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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04. 2024

우리는 흔적을 남긴다

6. 나선계단을 오르며(10)

“남편 셔츠예요. 비싼 것도 아닌데 이런 지원이라도 해야죠.”


제법 결연한 말투에 깜짝 놀란 이로미가 쳐다보자 김은지의 목소리가 금세 도로 작아졌다.


“사실 딸이 챙겨줬어요. 아빠는 이렇게라도 공헌해야 한다면서. 안 입는 거니까 뒤탈이야 없겠죠?”

“그럼요, 당연하죠. 안 입던 옷을 찾는 게 문제지 안 입는 옷을 재활용한 게 뭐 문제라고요.”


윤소은이 힘주어 거들자 비로소 김은지가 웃음을 보였다. 각자 가져온 옷가지를 꿰어 입는 와중에 최현욱이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발견한 이로미가 탄성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만들던 것보다 훨씬 크네요! 근데 선생님, 그거 직접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원하시는 분은 직접 작업하시게 해 드릴까도 했는데, 오늘 수업은 물레 성형에 중점을 두는 게 아니라서요.”

“에, 그러면요? 표면 장식 같은 거 하나요? 뭐… 화룡점정같이?”

“아뇨.”


이로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최현욱이 물레의 속도를 늦추었다. 항아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몸체가 커다란 도자기 기물을 잠시 바라보던 최현욱이 느닷없이 성형을 멈추고 그것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당연하게도, 완벽하게 우아한 형태를 그리고 있던 기물은 맥없이 한쪽이 뭉그러졌다.


“엑, 선생님. 망가졌는데…”


이로미의 말에 최현욱이 일부러 안아 우그러뜨렸던 기물을 놓으며 싱긋 웃었다. 미리 오늘 수업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지 이진우도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최현욱이 입구 부분이 우묵해진 기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보통은 그렇게들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은 약간의 발상의 전환을 해 보죠. 우리가 만들 건 이런 형태를 가진 거니까요.”

“어…”


헌 옷을 가져오라는 이유는 납득한 듯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들을 보며 최현욱이 질문했다.


“제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법의학자였던가… 범죄학자였던가, 아무튼 그런 분이 남기신 말씀이 있어요. 어떤 두 개체가 서로 접촉하면,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얘기였죠.”

“저 들어봤어요. 추리소설에서 본 것 같은데.”


알고 있는 이야기였는지 이로미가 반색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에도 완벽한 형태의 기물을 부둥켜안아 굳이 모양을 망가트린 이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은 여전했다.


“맞아요. 서로에게 남은 흔적과 자취로 범인을 추적할 수 있다는 얘긴데… 거기서 착안한 아이디어이긴 해요. 사실 외국의 도자기 클래스에서는 꽤 인기 있는 수업이기도 합니다.”

“애써서 물레로 빚어놓은 걸 망가뜨리는 게요?”


김은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반듯하게, 규칙을 지키며 살아온 삶의 습관을 벗어버리기 쉽지 않을 그녀로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요구였다. 당혹스러움에 젖은 질문을 받아 든 최현욱은 잠깐의 침묵 뒤에 더욱 활짝 웃으며 확고하게 대답했다.


“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요?”

“완벽한 형태의 작업물을 끌어안아 나의 흔적을 남기는 거죠. 끌어안는다는 행위는 같아도, 기물에 남는 흔적은 다 다를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히 다르겠… 죠?”

“끌어안는 행위에 정답이라는 게 있을까요?”

“그거야 아니지만요…”


빠르게 튀어 다니는 탁구공처럼 이어지던 대화가 멈추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반문을 계속하던 김은지가 무엇을 깨달은 것처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자 윤소은이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어떤 수업인지 알 것 같아요.”


최현욱이 고맙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가 그들을 둘러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떤 것은 굉장히 과격하게 구겨질지도 모르죠. 또 어떤 건 안아본 게 맞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아주 미약한 흔적만 남을지도 모르고요. 혹시 아나요, 아예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도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다 나름의 개성이 있고…”


그가 집중하여 듣고 있던 수강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며 확신을 주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맺었다.


“분명히 굉장히 아름다울 거예요. 그것만은 확실하죠. 이제 각자 물레 앞으로 가셔서, 준비해 주세요.”


최현욱이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손뼉을 짝짝 쳤다.


“저하고 진우가 한분씩 도와드릴 거예요. 먼저 나서 주실 분 계시면 자원해 주시고.”

“제가 먼저 할게요.”

“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요. 얼마나 엉망으로 망칠지 몰라도 제일 먼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로미의 짧은 감탄사를 뒤로 하고 윤소은이 쑥스럽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가슴께 까지 올라와 있는 항아리 형태의 기물을 보고 조금 긴장한 듯한 그녀가 곁에서 보조하고 있던 이진우를 돌아보았다.


“이건 진우 씨가 형태 잡아준 거예요?”

“네, 네. 조금 안 예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예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 아니잖아요, 오늘은.”


마른침을 삼킨 윤소은이 물레 앞으로 바짝 다가서자 이진우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한번 그러안고 나오면 될 일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을 마주 보고 나니 뜻밖의 두려움이 샘솟았다. 망가지면 어떡하지.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지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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