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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Oct 01. 2024

우리는 어제와 또 달라서

6. 나선 계단을 오르며(9)

“그러고 보니까, 은지 선생님 처음이랑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그래요?”

“저도 그런 생각했는데.”


김은지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윤소은을 먼저 쳐다보았다. 마치 조금 전까지 자신이 윤소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읽어낸 듯한 시선에 김은지는 재빨리 맞장구를 치고 나섰던 이로미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그, 그렇게 많이는 아닐 거예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후회만 늘어난다고들 많이 얘기하잖아요. 저도 아니라곤 못하겠는데, 은지 선생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 들으니까 참 좋았어요. 어쨌든 무얼 보든 긍정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와, 분위기 훈훈해.”


이로미가 짧은 촌평과 함께 손뼉을 짝짝 쳤다.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수강생들이 신중하게 작업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둘러보던 최현욱은 또 이런 수업을 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 지금 이들과 함께 만들어낸 시간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시간이 될 거라는 사실을 불현듯 예감했다. 같은 것을 가르쳐 주고, 같은 것을 만들어내더라도 분명 이들이 느끼고 발견해 낸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은 전조도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시간에 대한 기대감 역시 이들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그러니 역시 근사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그간 이들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진심에 보답한다는 차원에서라도.


***


“얘가 이젠 나한테 강매를 하려드네, 아주.”


이로미가 자랑스레 꺼내놓은 도자기를 기막힌 얼굴로 들여다보던 진태하가 손끝으로 접시 가두리를 살살 만져보며 투덜거렸다. 말은 그래도 카페를 생각하며 만들었노라고 꺼내놓은 몇 장의 접시가 맘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려 두른 에이프런 끈 옆으로 양손을 허리에 얹은 이로미가 인상을 썼다.


“강매라뇨,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다 하세요. 이건 백 퍼센트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이라니까요?”

“어, 그래. 그리고 똑같은 걸로 세트를 만들고 싶으면 그땐 돈 내고 주문하라 이거잖아.”

“그럼요. 당연하죠. 재료값 들고 인건비 들고 공정에 들어가는 수도요금에 전기요금까지 생각해 보세요!”


조목조목 짚은 이로미가 바 테이블에 앉은 최현욱을 바라보며 저 잘했죠, 같은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최현욱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일부러 이로미와 진태하를 외면한 채 창밖을 쳐다보며 딴전을 부렸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못 본 척하는 최현욱의 귓가에 땅이 꺼져라 내뱉는 진태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에휴, 그래. 못 만들기나 했으면 들은 척도 안 했을 건데.”

“사장님, 진짜로요?”

“진짜는 뭐가 진짜야.”

“들은 척하겠다는 건 주문하신다는 소리잖아요?”

“그런데?”

“하긴 제가 좀 뭐든 천재적으로 잘하긴 하죠.”


으쓱대는 이로미를 어이없이 멀거니 보던 진태하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픽 웃더니 최현욱을 불렀다.


“형님, 이 컬러만 이대로 살려서 이것보다는 조금 작은 사이즈로, 데미타스 잔도 같이 주문할 수 있을까요?”

“나, 나한테요?”


최현욱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진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 끝을 톡톡 두드렸다.


“초심자치고 잘한다는 건 저도 심미안이 있으니까 금방 알겠는데, 그래도 이제 막 입문반 끝내 가는 초보자가 만든 걸 어떻게 손님 테이블에 냅니까. 일류의 자존심이 있지.”


은근히 부업을 해볼까 하는 의도를 팍팍 살려서 진태하에게 영업을 시도하던 이로미가 어이가 없어졌는지 입을 헤벌렸다. 최현욱은 난처한 기색을 거두지 못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원래 쓰던 제품들도 많이 있을 텐데 갑자기 왜요?”

“그냥 이래 저래요. 오래 써서 변색된 것들도 있고, 나름 여기를 좀 제대로 키워볼까 하는 생각도 있거든요. 그러자면 뭐, 가게에서 쓰는 것들도 통일성 있게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진태하가 순식간에 째진 눈을 하고 저를 곁눈질하던 이로미를 보며 덧붙였다.


“얘가 그런 거 전문이잖아요. 전에 하던 일도 그렇고. 이름값있게 키워보려면 새로 배운 일보다는 원래 잘하던 일도 겸업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서요.”

“오, 깊은 뜻.”


까불거리며 참견하는 이로미에게 대번에 인상을 쓰며 가서 하던 일 해, 하고 으름장을 놓은 진태하가 작은 소리로 속닥였다.


“이제 혼자 일하시는 거 아니니까 이 정도 일은 감당하실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진태하의 표정이 얼핏 보면 장난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진지해 보이기도 해서 최현욱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만들어냈던 것들을 넘어서 누군가의 의뢰에 응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로웠다.


***


“이 정도면 될까요?”


윤소은이 티셔츠 한 장과 낡은 태가 완연한 올 풀린 카디건을 함께 꺼내놓으며 물었다. 아마도 남편의 것인 듯한 와이셔츠를 끄집어낸 김은지가 민망한 듯 말했다.


“저도 그렇게 가져올 걸 그랬나 봐요.”

“아, 이거 뒤판을 앞으로 해서 입으시면 되겠네요. 근데 은지 수강생님 옷은 아닌 것 같은데.”


웃음을 참으며 최현욱이 묻자 김은지가 뜻밖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네, 하고 대답하며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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