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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Sep 27. 2024

우리가 얻은 것

6. 나선 계단을 오르며(8)

“궁금한데 안 궁금한 기분이에요, 선생님.”


이로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해보면 틀림없이 좋을 거예요. 장담해요.”


최현욱이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많은 위로의 종류가 있는 법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만이 줄 수 있는 위로의 방식을 찾았다는 확신이 생겼기에, 수강생들이 조금 떠름해하더라도 밀어붙여볼 생각도 있었다. 슬쩍 둘러보니 궁금해하는 얼굴 반, 얼떨떨해하는 얼굴이 반이었다.


“그럼 오늘의 작업을 마무리해 볼까요. 그간 부지런히 참여해 주셔서 저는 참 좋았는데. 여러분은 어떠셨나 모르겠어요.”

“선생님, 어째 오늘이 마지막 수업인 것처럼 말씀하세요.”


김은지의 말에 최현욱이 고개를 설핏 가로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마지막 수업날엔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좀 번잡스러울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사실 끝까지 말씀드리지 않으려고도 했었는데,”


최현욱이 잠깐 이로미에게 시선을 주며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웃었다.


“원래 저는 클래스 운영 같은 걸 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정말로, 전혀요. 그런데… 누구라고 말씀 안 드려도 어쩐지 다들 짐작하실 것 같아서 그냥 말씀드리는 건데, 로미 씨가 굉장히 응원을 많이 해줬어요. 일단 시작해 보라고. 수강생이 안 모일 것 같으면 1호 수강생으로 등록하겠다고까지 해주면서 말이죠. 본인도 말도 못 하게 바쁠 텐데,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로미 씨는 본인의 말을 이렇게 성실하게 잘 지켰죠.”

“쌤도 참.”


뭐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듯이 당당한 모습에 최현욱이 빙긋이 웃어주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정말 별것도 아닌 가벼운 말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도 묵직하고 따뜻한 응원이 된다는 걸 이번에 제가 제일 크게 느꼈어요.”

“저도 응원 많이 받았어요.”


냅다 끼어든 이진우의 말에 최현욱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무모할 정도로 계획적이지 못했던 시작이었다. 종착지가 보일 듯 말듯한 지점에 와서야 최현욱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이 새록새록 움트는 것을 느꼈다. 자부심과 아쉬움이 양면처럼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아예 남지도 않았을 마음은 거름이 되기도 하고 기틀이 되기도 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될 수도 있을 시간들을 건넬 수 있었다는 것이 최현욱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저는 위로요.”


김은지도 끼어들었다. 자기 이야기를 곧잘 하는 사람들이 늘 신기했던 김은지는 어디서든 제가 먼저 나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저절로 입이 열렸다.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한 번쯤 용기를 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오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줄 것만 같다는 믿음이 김은지를 끌어올렸다.


“어떤 위로요?”

“그냥…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 같아요. 그전엔 모범적인 삶이랄까, 그런 게 있는 줄 알았거든요.”

“정말로요?”

“네.”


깜짝 놀란 이로미가 반문하자 김은지가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어떤 이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좋다고 말하는 것이 또 어떤 이에게는 전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처럼.


“제가 쭉 살아온 모습도 그랬고, 해오던 일도 그렇고… 매뉴얼 같은 게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하면 틀리지 않는다고요. 근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그걸 이렇게 흙 조물거리면서 뒤늦게 깨달았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고, 근데 또 여전히 모르는 채로 살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아득하기도 해요.”

“도움이 되셨어요?”

“그럼요. 내 맘대로 살아도 크게 잘못될 것도 없다는 걸 이렇게 늦게 알아서 억울할 지경이에요. 한편으론 그래서 좋은 기회 얻은 진우 씨가 부럽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김은지는 홀가분해 보였다. 손끝으로 지난 수업에 만들었던 컵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난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도자기 만들다가 이렇게 손자국이 남아도 여길 잡고 컵을 들어 올리는 데는 아무 문제없잖아요. 이게 컵일 때는 당연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같은 문제를 사람의 경우에 가져오면 옳고 그른 게 생기는지 그런 의문도 들고 그랬죠.”


김은지의 말을 흥미롭게 듣던 윤소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게 손맛 나서 더 예쁜데 말이죠...”

“그러니까요. 다들 제 모습이 있는 건데요.”

“그죠, 다들 자기 살아온 흔적 그대로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어딘가 애잔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윤소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은지는 내심 궁금했던 만큼 캐묻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자신은 속내를 이야기해서 털어버리는 사람이었지만, 모르긴 해도 윤소은은 스스로 제 몫의 고통을 삭혀내는 종류의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김은지는 그럼에도 자신들이 있어서 윤소은이 끌어안고 있던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졌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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