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선 계단을 오르며(6)
이진우는 다른 대답을 마음속에 밀어 넣은 채 일어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달리 제 마음을 표현할 말재주 같은 게 없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갖은 일을 다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접는 건 하루에도 십수 번은 하게 되는 일이었으나 지금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 이진우는 고민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단순한 행위 속에 진심을 담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울컥 가슴에 맺힌 감정을 말로 하는 대신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 인사에 그 마음의 십 분의 일이라도 담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그래요.”
윤소은이 나서서 대답해 주자 이진우는 여전히 시선을 땅에 박은 채 머뭇거리며 뒤돌아섰다. 제 뒷모습에 남은 이들의 시선이 달라붙어 있다는 걸 의식한 듯 걸음은 느릿했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가 이번엔 껑충한 소년을 내보냈다.
“그림자마저 쭈뼛거릴 건 뭐죠, 대체.”
이로미가 투덜거리며 빈 커피잔을 모으자 최현욱이 그녀를 토닥였다.
“환경이 사람을 소심하게 만드는 경우가 은근 있어요, 로미 씨. 로미 씨처럼 화통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지 않고 사는 게 불가능했던 사람도 있는 거니까.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는 거예요. 이해하려고 하는 건 품이 많이 들지만, 그래도 그것도 꽤 보람 있는 일이에요.”
“선생님은 참… 나긋나긋하게 면박 주는 데 소질 있으세요.”
“면박 주려는 거 아니었는데.”
“알아요.”
고개를 든 이로미가 푸스스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답지 않게 잔소리가 길었다고 자책한 최현욱이 그녀의 반응에 다소 긴장을 풀며 등을 기대었다. 흘긋 바깥을 바라보았다가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이 된 진태하가 음료 두 잔을 만들어 와서 내려놓았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두 분이 좋은 기회 마련해 주신 건 알겠네요.”
“글쎄요, 그렇게 받아들여주면 좋으련만. 근데 이건 뭐예요?”
진태하가 씩 웃으며 으스댔다.
“뭐긴요, 서비스죠, 서비스.”
“갑자기요?”
“그런 날도 있는 거죠, 뭐.”
최현욱은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욱과 윤소은을 번갈아 쳐다보던 진태하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가 듣기에도 진심이 팍팍 느껴지던걸요, 뭐. 그 학생한테는 틀림없이 잘 전달됐을 거예요. 옆에서 보기에도 그래 보이던데요.”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 상대에게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전달한다는 게.”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타는지 최현욱은 잔을 들어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최현욱이 꺼내놓은 말을 저마다 곱씹으며 침묵을 지키는데 갑자기 문이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에 달린 종마저 덩달아 평소의 제 박자를 놓치고 엇박으로 쪼개진 리듬을 뱉었다.
“어?”
이로미가 당혹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된 이진우가 헉헉거리며 문간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진우 씨,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어요?”
그렇잖고서야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돌아올 일이 뭐가 있겠나 싶었던 윤소은이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여전히 숨을 몰아쉬던 이진우가 고개를 휙휙 소리 나도록 가로저었다.
“그럼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왔어요?”
“할래요.”
“네?”
“저 선생님이 하시는 일, 그거 배우고 싶어요.”
조금 전에 그것 또한 선택지 중의 하나로 제안한 것이 그들이었지만 이런 반응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해하며 그래요, 그렇구나를 말하던 최현욱을 슬쩍 밀어내며 윤소은이 차분하게 물었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했는데. 금방 신중해졌네요?”
“어. 아, 네. 신중… 하게 생각했…”
무안해하면서 뒷덜미를 긁적이던 이진우가 느릿느릿 말을 끄집어냈다.
“나가면서, 생각하려고 했는데 공방이 보이더라고요.”
“그랬어요?”
“네.”
이진우의 귓불이 빨갛게 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소은과 최현욱은 물론이고, 이진우를 몇 번 본 적 없던 진태하마저도 그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끌어모았을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어떻게 해야 신중해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이 장소를 되게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공방에 오는 날이면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물론 제가 실물로 보고 싶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아서 배우려고 한 건 맞는데, 그런데 여기에 제가 속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냥, 그냥… 뭐지? 이걸 뭐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봐요, 괜찮아요.”
윤소은이 상냥하게 격려했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나는데 그걸 정돈하지 못해 흥분한 학생들을 다듬어주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쭉 해왔던 일이었으니까.
“그냥… 여기 카페에 오면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는 사장님이 계시고, 누나도 계시고… 공방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귀여운 걸 만드시는 선생님도 계시잖아요.”
“그렇죠.”
“저도 거기서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이곳을 다녀갔을 때…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고.”
이진우가 못내 부끄러운 얼굴로 말을 마쳤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를 주도적으로 결정했음을, 제 마음을 일부나마 내보이는 경험을 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필화의 성실한 조력을 받아 파스 투혼 중인 담화입니다.
지난 화요일은 아시다시피 기나긴 명절 연휴의 중간이었고... 예... 그러저러한 까닭에 연재를 쉬게 되었군요. 행여라도 기다리신 분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
이제 거의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집필분량이, 되짚어 보니 12만 자가 넘어갔더군요. 15만 자는 넘기지 않기를 주문처럼 외우는 중입니다...
그럼,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