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선 계단을 오르며(5)
“그러면 이 두 가지 안 모두 진우 씨에게 말해주는 걸로 해요.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걸로. 뭐가 되었든 저희는 그저 서포트만 조용히 해주는 걸로 하고 말이죠.”
“서포트.”
그 말이 최현욱의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또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 표정이 잠잠해지는 그를 보며 윤소은은 조금 다급히 말했다.
“지금처럼 여러 아르바이트하면서 할머니를 봉양하는 건 여러모로 가장 안 좋은 선택지 같아요. 하물며 그걸 계속 유지한다는 건 어린 진우 씨에게 너무 가혹하니까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공감이었다. 최현욱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진실하게 보이기를 바라며 확고하게 답했다.
“그럼요.”
***
“어, 네?”
정작 그들이 불러낸 이진우는 지금 제가 뭘 들은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카페 바깥으로 한 시간 전쯤 최현욱이 걸어 잠그고 나온 공방이 보였다. 이렇게 이야기가 어려워질 줄은 몰랐다고 생각한 최현욱이 들리지 않는 한숨을 뱉었다. 이진우가 받아들일 때까지 몇 번이고 설득하겠다는 의지를 품은 양, 윤소은이 다시 그를 부르려던 때였다.
“왜 못 알아들은 척해, 진우 씨?”
트레이를 옆구리에 낀 채 잔뜩 인상을 쓴 이로미가 비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접객 태도만큼은 만점이라고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진태하조차 사색이 되어 카운터 뒤에서 쫓아 나왔다. 그가 다짜고짜 이로미의 팔을 먼저 붙잡았다.
“야, 너 왜 이래? 손님한테 무슨 태도야, 이게.”
“사장님은 잠깐 빠져보세요. 동생 같은 애한테 한 소리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기세로는 이로미도 만만찮았다. 아주 작정을 한 사람처럼 홱 돌리는 턱선을 따라 칼단발이 찰랑 물결을 일으켰다.
“진우 씨,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빠?”
냅다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얼이 빠진 얼굴로 멀거니 이로미를 쳐다보던 이진우가 비로소 아니요, 대답을 했다. 그 표정이 조금 달라진 것을 눈치챈 윤소은이 최현욱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고 아주 약간 몸을 뒤로 기댔다. 네가 한 번 설득해 보라는 무언의 응원을 받은 이로미가 한층 기세등등해졌다.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던 진태하마저 최현욱이 가만히 팔을 뒤로 잡아당기자 눈치를 챘는지 한 발 물러섰다.
“교수님이랑 선생님이 이런 자리까지 따로 마련한 이유를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왜 그렇게 속 뻔히 보이는 짓을 해?”
노골적인 핀잔에 귓불이 벌게진 이진우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입은 침묵을 지키는데 연신 손끝을 맞부비는 것이 할 말이 너무 많거나 아예 없거나 둘 중 하나인 듯싶었다.
“정말 그런 생각해본 적 아예 없었어요?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요.”
윤소은이 말투를 바꾸어 아이를 어르듯 물었다. 조언조차 함부로 건넬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인 사이에, 꺼낼 수 있는 말의 가짓수는 적어도 너무 적었다. 그나마도 에둘러 말해야 했다.
“지나친 참견처럼 들릴 수 있는 거 알아요. 근데, 딱 하나는 알려주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러저러한 게 있다는 걸 알고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눈에 보이는 걸 선택하는 건 정말 다르다는 거.”
“교수님 말씀이 정말 맞아요, 진우 씨. 어른들 오지랖이 맞긴 맞지.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라고 해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진우 씨한테 뭔가 더 도움이 되는 길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
그쯤 이야기가 깊어지니 이진우도 더 이상 모른 체 하기는 힘들었다.
“네… 생각해 볼게요.”
“꼭 잘 생각해야 돼요. 할머님 하고는 벌써 의논했어요.”
윤소은이 장난스레 덧붙인 말에 이진우의 입이 헤벌어졌다. 귓불을 잡아당기며 만지작거리던 그가 잘못을 자백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저, 저희 할머니가 벌써 아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무슨 그런 일없는 질문을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던 윤소은이 갑자기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할머니 하고 상의할 거 아니었어요? 진우 씨한테 할머니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젠 나도 대강 알 것 같은데 말예요.”
“그럼… 할머니 하고도 다시 얘기해 보고 잘 생각해서 결정할게요.”
“진작 그랬으면 좋았잖아요.”
양손을 허리에 짚고 한껏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이로미가 덩달아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말투도 원래의 반존대로 되돌아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저를 흘끔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리던 이진우를 본 것인지 그녀가 새삼 인상을 쓰며 이진우의 어깨를 힘주어 때렸다.
“할 말 있으면 깔끔하게 말합시다, 응?”
“누나, 아까처럼 말 편하게 해주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눈치 좀 보지 마, 제발!”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어깨를 으쓱 추켜 보이는 이로미의 허리께에서 이진우가 얻어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아이처럼 웃었다.
“잘 생각했어요. 진우 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응원할 거예요. 부담되는 도움은 달라고 해도 안 줄 거니까 걱정 말고, 그 밖의 다른 건 뭐든 물어봐요.”
신세 지는 것을 죽어라 싫어하는 마음을 배려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배려받은 당사자조차 머쓱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잊어버릴 뻔했네, 하며 이진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들에게 면구스러워하는 마음에 대고 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진우 씨한테는 꿈꿀 시간이 필요해요. 할머니도 그걸 원하실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