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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Sep 10. 2024

선택할 수 있다면

6. 나선 계단을 오르며(4)

갑자기 자세를 고친 윤소은이 진지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원래도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유난히 각이 잡힌 태도에 최현욱은 덩달아 긴장했다. 머뭇거리던 최현욱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얘기,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오늘 따라온 거예요. 진우 씨한테서 아무런 인상 같은 거 받으신 적, 혹시 있지 않으세요? 저는…”


있거든요. 최현욱은 그녀가 채 입에 담지 않은 말을 알아들었다. 혈연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강사와 수강생, 내지는 동료 수강생의 입장으로 만난 사이임에도 누군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유 같은 건 몰라도 그런 말을 꺼낸 윤소은의 마음에 공감했기에 최현욱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능이 아까울 정도죠. 조형 감각도 좋지만 색감이 아주 타고났더라고요.”

“네. 저도 그 생각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조형감각, 색감뿐 아니라 관찰하는 힘이나 집중력이 정말 뛰어나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 못지않은 재능이 있어 보여서 그냥 두고 보기가 안타까웠어요. 직업병일까요?”

“좋은 거죠, 재능을 살려주고 싶어 하는 건.”


최현욱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자 윤소은은 빙그레 웃었다.


“예술적인 일을 하기에 좋은 자질들이 많아서 사실 진우 씨만 원한다면 제가 이런저런 장학금이나 지원제도를 알아봐 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진우 씨 상황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여력이나 상황도 안 되고, 좋은 기회가 있어도 그 성격에, 할머님 두고 잡으려고 할 것 같지도 않고요.”
“그건… 그렇죠. 심성이 참 착해서.”

“그래서 의견을 좀 여쭙고 싶었어요.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가장 좋겠지만, 그 성격에 폐 안 끼치려고 절대 말 안 할 테니 말이죠."


어떤 기회는 붙잡아 누리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대체로 뭔가를 배우기 위해 주어지는 기회들은 일상적인 삶을 부분 내려놓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잠깐이나마 이진우의 사적인 삶을 들여다본 경험으로는 제 장래를 위해 현재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리를 도외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타인의 삶에 우선순위를 정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좀 생각을 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교수님 생각이랑 잘 맞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시선을 슬쩍 피하며 유약 몇 개를 골라 드는 모습이 머쓱함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최현욱이 고르는 색상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윤소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그러셨구나. 그래도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보면 더 좋은 방향으로 모아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윤소은은 남들 앞에서 제 의견을 말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의견을 끌어내는 것에 능했다. 그것도 아마 그녀의 재능일 것이다.


“솔직히, 저는 대학 진학이나 장학금까지는 생각을 못 해 봤어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희 공방에서 일을 좀 가르치면서 직원으로 데리고 있어 볼까… 하는 생각은 해 봤어요.”


여전히 윤소은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느라 최현욱은 찰나 윤소은의 표정이 반짝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전히 진열 선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부연했다.


“진우 씨가 혹여나 이 일을 좋아한다면, 다른 일 하는 것보다는 공방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인 부분도 해결하고 일도 배우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장기적으로 도예에 정식으로 입문하겠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더 많겠죠, 아무래도. 이래저래 거창하게 말했지만 뭐 다 진우 씨만 좋자고 하는 건 아니고, 저도 가끔 손이 부족할 때가 있어서요. 근데 이건 제 사심이 좀 많이 섞여 들어가서, 차마 제 입으로 권하기는 또 그렇더라고요.”

“그건… 정말 좋은 생각 같은데요.”


최현욱은 속내를 감추는데 능한 편은 아닌 것 같다고, 윤소은은 생각하며 웃음을 감추었다. 웃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던 최현욱이 민망해 어쩔 줄을 모를 것 같았다. 눈썰미 좋은 그녀가 보기에 공방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번잡하고 바쁜 공간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꿈을 키워주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핑계를 가져오느라 얼굴 한쪽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못 본 척해주고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처음 클래스를 시작했을 때, 인생 항로 한 번쯤 크게 틀어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지 않겠냐고, 사연 한두 개쯤 없는 사람도 없지 않겠냐고 담담히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을 먹고 자란 사람이 보다 사려 깊은 배려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의무일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했다. 그녀 역시도 그런 작고도 작은 다정다감으로 인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하긴, 공방에서 일을 하면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진우 씨에게 더 매력적일 수 있겠어요.”


윤소은이 어쩐지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하는 말에 비로소 고개를 든 최현욱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서 결정지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자기 발견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고요. 교수님 말씀하신 대로 대학 진학도 좋은 선택지예요. 각오만 되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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