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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Sep 03. 2024

새로운 도전들로 인해 빛나는

6. 나선 계단을 오르며(2)

노인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도 않게,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유창한 말이 흘러나왔다.


“몇 가지 선택지를 주어보고 싶어서요. 할머님 손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없지는 않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거든요. 길이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하는 일들이 많은데 사실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고마워서 어떡하나, 우리 손주를 이렇게 살뜰히 챙겨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에요. 제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부담 갖지 마세요.”

“그게, 그런데… 우리 손주가 재주가 없는 애는 아닌데, 형편이 안 되어놔서 포기한 것이 많다오.”


대체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미안함에 푹 젖은 음성이었다. 윤소은이 고개를 내저으며 노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런 마음을 품어본 것이 처음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처음이 그렇듯 윤소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진우 씨가 아직 어리고 꿈꿀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옆에서 보고 있으니 안타깝기도 하고요. 방법을 몰라서 포기하는 일들이 많은데 사실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그래도 그것도 할머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나야 고맙지요, 이 은혜를 어찌 갚나…”


제 손을 도리어 더 꼭 붙잡은 노인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누군가에게 여전히 도움이 된다는 게 저는 더 감사해요. 정말이에요.”


진심이었다. 자신이 존재하거나 말거나 세상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지난 시간이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힘겨운 싸움 중에 우연히 만났던 작은 친절과 호의가 오히려 삶을 붙들고 싶게 했었던 적이 많았다.


항암을 하던 때 간호사가 건네곤 했던, 오늘도 수고하셨고 앞으로 조금 더 고생하자는 소박한 격려가, 어쩌면 자신보다 더 아프고 힘들지도 모를 소아암 환아가 배시시 웃으며 쥐어주던 막대사탕 하나가 다음을 기약하고 싶게 했다.


그런 사소한 선의가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작은 친절이 오늘의 나를 살고 싶게 만들었다고. 나도 별 볼 일 없는 작은 선함을 베푸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십여 분이 지나 헐레벌떡 돌아온 이진우를 보며 윤소은이 웃었다. 언젠가, 그가 단단한 어른이 되었을 때에 그 역시도 작은 도움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다정함을 선물할 수 있으면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뿌듯한 기분을 안고 집에 돌아온 윤소은의 눈에 제일 먼저 와닿은 것은 테이블 위의 작은 코기 인형이었다. 가만히 인형의 까만 눈에 시선을 맞추느라 무릎을 굽혔던 그녀가 손을 뻗어 도자기 인형의 머리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라미야, 모르긴 해도 너를 만든 분도 뭔가를 끌어안고 삭였던 세월이 길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네 표정도 이렇게 한없이 넉넉한 거겠지. 남은 말은 소리 없이 입속에서 그대로 녹았다.


***


“오늘 작업은 여기서 슬슬 마무리해 볼까요?”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 제법 숙달된 솜씨로 작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의 손놀림이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급해졌다. 헛웃음을 지은 최현욱이 얼른 덧붙였다.


“차분히 정리하세요. 갑자기 급하게 마감하시다가 괜한 실수 나오면 제가 더 마음이 안 좋아요.”


서두를 필요 없다고 에둘러 말하던 그가 유약통 몇 개를 훑어보았다. 이 수업의 수강생들은 유난히 따뜻한 색을 좋아했다. 닳아가는 색상 몇 개를 체크하던 최현욱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당겨 올라갔다.


“선생님, 왜요?”


눈치 빠르기로는 제일인 이로미가 그의 미약한 표정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별 거 아니에요. 수업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라는 게 정말 다르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도 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는구나 싶은 게 눈에 보여서 말이죠.”


최현욱이 유약과 그들의 작업물을 번갈아 가리키며 짧게 부연했다.


“각자 선호하는 색이 이렇게 다 다른데, 그런데 전반적인 배색감이나 톤은 또 비슷하게 흘러가잖아요. 혹은 이렇게 개성이 튀는 분도 있고.”


굳이 누구의 작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도 그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 잠깐만요.”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다는 말투였다.


“네?”

“혹시 오늘 수업 이후로 시간 괜찮으신 분, 같이 재료상에 구경 가실래요? 유약 색도 여기 없는 것도 많으니 직접 보시면 재미있으실 수도 있고.”

“가고 싶은데…”


말꼬리가 늘어지는 것이 가고는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이 거의 동시에 두 사람에게서 나왔다. 최현욱이 웃음을 삼키며 이로미의 말을 받았다.


“로미 씨야 카페 일 있을 것 같고. 은지 수강생님은요?”

“너무 가보고 싶은데요, 근데 오늘 딸이 같이 뭐 찍자고 해서 안될 것 같아요.”

“영상 찍으세요?”


윤소은이 놀란 얼굴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물어왔다. 김은지는 그런 질문조차도 반가운 듯했다.


“네. 별 건 아닌데 저랑 같이 뭘 해보고 싶대요. 자긴 나중에 영상 미디어 다루고 싶은데 그냥 습작 삼아서 해보고 싶은 기획이 있다고 협조해 달라나 뭐 그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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