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12) | 6. 나선계단을 오르며(1)
“해도 해도 힘들지 않은 일...”
김은지가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나 그 말을 가만히 되뇌어 보고 있는 건 분명 김은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각각 생각에 잠겨 있는 게 확실한 얼굴들이었다. 잠시 기다리던 이로미가 기대에 찬 눈으로 김은지를 보았다.
“어때요? 생각나는 게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딸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게 기억나서요.”
“뭐라고 했는데요?”
이로미가 사뭇 궁금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조금 마음대로 살라… 고?”
비슷한 맥락이었지, 속으로 헤아리던 김은지가 말꼬리를 흐렸다. 카페에서 그녀가 딸과 함께 앉아서 얘기하던 날 걱정스레 그들을 쳐다보던 기억을 떠올린 이로미가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엄마 챙겨주는 엄청 예쁜 딸이네요.”
“그러니까요. 따님하고 같이 생각해 봐도 되겠어요.”
“네?”
“그, 처방전… 요.”
이로미가 열띠게 말했던 것들을 뭐라고 요약해야 할지 고민하던 윤소은이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말해놓고도 이게 어울리는 말인가 싶어 멈칫거렸던 그녀와 달리 김은지와 이로미는 직관적으로 이해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위한 자기만의 처방전, 좋은데요 그거.”
“그런데, 제 생각엔 스스로를 북돋기 위한 그 처방전은 가급적이면 동사형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윤소은이 재빨리 덧붙였다.
“네? 동사요?”
“네. 그러니까, 움직이는 말. 보통 처방전은 약품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근데 이건 왠지 꼭 무엇 무엇을 한다, 하자, 이렇게 되어야만 할 것 같아요.”
“어, 알 것 같기도 하고, 좀 헷갈리기도 하고.”
이로미가 인상을 쓴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윤소은이 뭔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법이 없었기에 김은지도, 이진우도 덩달아 이마를 찡그린 채 진지해졌다.
“그건요,”
윤소은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꽤나 따뜻해진 바람 덕분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매달아 두었던 크리스마스 로즈 봉오리를 닮은 풍경을 차라랑, 흔들어 놓고 가는 바람에 맑은 종소리가 분위기를 한 번 흔들어 놓았다.
“전 조금 알 것 같은데.”
주로 경청하는 쪽이었던 최현욱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뀌지 않거든요. 심지어 내 마음조차도 그렇죠.”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윤소은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고맙다는 뜻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움직여야만 되거든요. 그래야만 기분이 달라져요. 뭐랄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기분의 공기층이 바뀐다고 해야 하나.”
“아...”
김은지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상대적으로 어린 축에 속하는 이로미와 이진우를 제외하고 김은지와 최현욱이 동시에 윤소은에게 조용히 시선을 모았다. 일반론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체에 거른 촘촘한 말이라는 사실을 윤소은과 비슷한 정도의 시간을 몸으로 통과한 그들은 금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이다. 김은지처럼, 당사자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윤소은은 어느새 시선을 돌리고 굽칼을 움직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단단히 여민 태도로.
“어, 교수님?…”
부지런히 퇴원 준비를 하던 이진우가 성큼 다가선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이진우를 먼저 알아본 사람이 생글 웃으며 손을 쭉 내밀었다.
“벌써 짐 다 쌌어요? 와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어떻게 아시고…”
“다 아는 방법이 있어요.”
“......”
윤소은이 멍하니 선 이진우의 손에서 작은 짐가방을 빼앗아 들며 물었다.
“원무과는 다녀왔어요?”
“아뇨, 아직.”
여전히 벙쪄있던 이진우가 윤소은이 새삼 재촉하듯 묻는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왜 여기 오셨냐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윤소은은 이미 침대로 다가가 이진우의 조모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어째 또 먼데까지 오셨나.”
“할머님 모셔다 드리려고요.”
“예에? 교수님이 왜요?”
노인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좀처럼 목소리를 크게 하는 법이 없던 이진우의 놀란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침대 프레임을 톡톡 두드리던 윤소은이 대답 대신 딴소리를 했다.
“진우 씨, 내가 있을 테니까 얼른 원무과 다녀와요.”
“네? 아니, 근데 왜…”
“아님 내가 병원비 수납하고 올까요? 그것도 괜찮은데.”
윤소은이 씩 웃으며 제안하자 사색이 된 이진우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후다닥 몸을 돌려 나갔다. 이진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윤소은이 뒤돌아보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구먼. 맞지요?”
“네. 할머님, 혹시 진우 씨가 할머님께는 뭐가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그러면야 얼마나 좋겠냐마는.”
주름 사이로 서글픔이 배었다. 노인이 고개를 슬쩍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내가 저 앞길 막고 있다 생각할까 봐 아뭇소리도 안 하는 애가 되어놔서 맘이 안 좋지요.”
아스라한 시선이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노인이 보고 있는 기억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네 하고픈 것 하라고 등 떠미는 할머니와 그런 것 없다고 고집부리는 소년의 실랑이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윤소은이 일없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요, 할머님. 혹시 제가 진우 씨 뭣 좀 공부하라고 억지로 시키면 많이 언짢으시진 않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