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솔직해져도 괜찮아요(11)
윤소은은 늘 그렇듯 크게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고 슬쩍 웃었으나 선명하게 치열이 드러나는 걸 보면 그녀가 이로미의 폭탄 발언에 몹시 유쾌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열렬한 동의를 얻어냈음에 만족스러워하던 이로미가 삽시간에 고개를 뒤로 휙 꺾어 최현욱을 보았다.
“선생님도 웃으셨죠?”
“네? 아, 네. 그럼요. 지극히 타당한 말을 했죠, 로미 씨. 항상 그런 것처럼.”
“그죠?!”
이로미가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제 갓 서른 언저리의 아가씨가 어째 우리 대변인이 된 것 같아서 좀 민망한 기분인데요.”
윤소은이 웃음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이로미가 당치 않은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도 나이 먹을 건데요. 그, 음. 노후대비예요, 이건.”
“이런 노후대책은 처음 듣긴 하는데 어쩐지 말이 되네.”
“이상하게 누나 말 듣다보면 다 맞는 말 같아요…”
제가끔의 감상을 토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기양양하게 웃던 이로미가 큼큼, 하고 부러 목을 가다듬었다.
“이거 원래 제가 터득한 인생의 치트키인데요, 제가 여러분들을 엄청 좋아해서 트윽별히 말씀드리려고요.”
“그게 뭔데요?”
윤소은이 냉큼 묻자 이로미가 답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요, 그걸 다 적어놓는 거예요. 바로 해보기 어려운 일은 언제까지 해보겠다, 하고 예상 달성 목표일을 같이 적어 놓고, 좀 쉬운 건 틈틈이 해 보는 거죠. 예를 들면 혼자 영화보기 같은 것. 에이, 말해놓고 보니 별 거 아니긴 한데.”
“사람들이 뭐 방법을 몰라서 부자 못 되고 다이어트에 성공 못 하는 건 아니잖아요.”
윤소은의 두둔하는 말에 이로미가 고맙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려보였다.
“맞아요. 쉬운 것부터 하는 거예요. 뜻밖에 효과가 좋았던 걸 목록처럼 만드는 거죠. 이걸 하면 기분이 +3포인트 좋아진다, 의욕이 +10포인트 샘솟는다.”
“게임이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이진우가 이로미의 도끼눈을 보고 허둥지둥 제 입을 막았다. 덕분에 발랄한 음성이 조금 새침해졌다.
“아, 웃지 마세요. 이거 진짜 효과 있단 말이에요. 그거 적어놓은 거 나중에 보면 꼭 눈에 보이는 능력치 달성 같다고요.”
“근데 전 동의해요. 아프고 의욕 없을 때 그런 사소한 것에 도움 많이 받았어요. SNS에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연재해주는 짧은 만화나 처음 보는 브랜드의 차를 사 봤는데 의외로 맛있으면 득본 기분이잖아요? 진짜 위로가 되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더라고요.”
윤소은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그러니까 그게 정말로 게임 같은데요…”
한 번 타박을 들어서인지 의기소침해진 이진우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로미가 사뭇 억울한 어조로 주장하며 숨을 골랐다. 아직 자신에게 고여있는 시선들을 의식한 그녀가 입술을 쫑긋 모으더니 최후의 한마디를 내려놓았다.
“얘기가 좀 엇나갔는데, 암튼 요지는 내 인생은 소중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추구하고 표현하기에도 인생은 한없이 부족하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일들이 나를 이끌어줄 때가 반드시 온다.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주위에서 까짓 빌런들이 나를 좀 무시하고 괴롭힌들 결코 꺾이지 않는다, 이런 거죠. 왜? 목표가 있는 한 나는 수퍼히어로니까! 다들 모르셔서 그러는데, 사람은 누구나 초능력 하나쯤 갖고 있다니까요.”
윤소은은 감탄한 빛을 숨기지 않은 채로, 이진우는 아래턱이 빠질 듯 입을 떡 벌린 채로, 김은지는 붓기만 남기고 눈물이 바싹 말라버린 얼굴로 저마다 감상을 표현했다.
“이거, 참. 로미 씨한테 많이 배우는데요.”
마침내 침묵을 가르고 최현욱이 말을 꺼냈다. 이로미의 말마따나 사람마다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로미의 초능력은 아마도 저 무한한 긍정성에 닿아 있을 것만 같았다. 최현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손뼉을 쳤다. 한참 열변을 토하던 이로미는 그제야 조금 쑥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그럼, 저도 그런 게 있으려나요…”
이로미의 박력 넘치는 설득에 홀린 듯했던 김은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소리가 되어 나온 것을 뒤늦게 인식한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남긴 자국과는 다른 홍조가 돌았지만,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요, 당연하죠.”
뜻밖에도 답은 최현욱에게서 들려왔다.
“왜 있잖아요? 나한테는 유독 쉬운 일인데 남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 나는 아무리 해도 힘들지 않은 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해도 해도 에너지가 붙고 지치지 않는 일 말예요. 반대로 남들은 너무 쉽게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지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나요?”
그 말을 하는 최현욱의 시선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듯 허공에 박혀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것이 삶에 치열하게 부딪혀 몇번이고 좌절해봤던 경험에서 나온 진실한 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렸다. 천천히 마침표를 찍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그런 게 은지 수강생님한테도 분명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