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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Nov 25. 2024

나는 너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데라치 하루나, 강기슭에 선 사람은

지난 3주간 서울을 줄기차게 드나들었다. 한때 오랫동안 살았던 곳인데도 떠나 있던 시기가 길다고 왜 그리 번잡하고 정신이 사나운지 막판에는 어딜 가든 인파에 몸을 맡긴 채 휩쓸려 다닌 것도 같다. 서울에서 홀로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는데, 오랜 친구를 만났던 두 번을 제외하고 갑자기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도장 깨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내가 갔던 지역 곳곳에 포진한 알라딘 중고서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더랬다. 


내가 오늘을 위해 보관함을 그리도 꽉꽉 채워 놓았던가(그럴 리가 있냐). 가는 곳마다 보관함에 밀어 넣어 두었던 책들이 얼굴을 내밀고 날 좀 보라고 시선을 끄는 건 또 웬 말인가(착각도 적당히). 어쨌든 신났고 즐거웠다. 카드사도 연신 찍히는 매출전표에 신났을 거라 확신하는 바다. 그저 나의 통장 잔고만이 외롭게 울부짖었겠지. 


여하간.


권수가 과히 많지 않을 때는 짐가방 속에 넣어서 직접 가져오기도 했고 *만원이 넘어가면 가뿐하게 택배 신청을 했다가 그다음 주가 되어 받아보기도 했다. 매장에서 직접 골랐던 책을 택배로 받아보는 건 또 그 나름대로 신선한 맛이 있다. 그렇게 집으로 들고 온 책들 중 하나를 마침 다 읽었다. 


http://aladin.kr/p/GRvic


한동안 TBR(ToBeRead)리스트 노트를 야무지게 썼었다. 그 노트엔 읽고 싶은 책 제목은 물론이고, 어디의 누가 소개했는데 어떤 대목에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까지 적어두어서 후에 읽을 책을 선별하는데 퍽 도움이 되었는데, 쓰고 있는 기록물이 과하게 늘어나다 보니 읽고 싶은 책 목록까지 관리하는 건 상당히 힘에 부쳐서... 그래서 결국 그냥 알라딘 보관함에 쭉쭉 밀어 넣는 걸로 대체하는 바람에 어디서 알게 된 책인지 하는 그런 부가적인 정보는 완전히 휘발되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이 소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고, 일본소설 특유의 그런 분위기를 가진 소설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면서 살까 말까를 되게 오래 고민하다가 그리 두껍지도 않으니 모험하는 셈치자 생각했는데 며칠 전의 나를 진심을 다해 칭찬하고 싶었다. 정말 잘했다, 22일의 김담화야. 


과하게 정의로운 척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첨예한 이슈들을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엮어넣다니. 이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구나 싶어 감탄했다. 인물들 중 누구도 도드라지게 튀지 않는다. 모두가 '있을 법하게' 핍진성 있는 인물들인 동시에 그들 모두에게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여밈 없이 열어둔 것도 굉장히 감탄스러웠다.


카페의 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하라다 기요세는 어느 날 갑작스레 남자친구 마쓰키 게이타가 사고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본인 스스로 그를 자연스레 연인으로 칭하고는 있어도, 사실 두 사람은 크게 다툰 후 몇 달째 데면데면한 상태만을 유지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기분으로 그의 방에 들어섰던 기요세는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물건을 발견하며 고뇌에 휩싸인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다음과 같다. 그의 방에서 누가 봐도 연심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한 편지 초안을 발견한 기요세는 마쓰키를 매섭게 다그치지만 그는 오해라는 말만 반복한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신은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기요세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런 와중에, 마쓰키는 전말을 알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하고 의식을 잃게 된 것이다.


특별한 단어는 하나도 쓰지 않았는데, 분명 애정이 전해지는 말이었다. 나도, 내 소중한 사람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일이, 좋은 날이 되기를. -122쪽
"알았더라면 어쩔 수 없네, 정상이 아니네, 하고 뭐든 너그럽게 봐주려고요? 꼭 있어요. 발달장애라는 말을 듣자마자 허둥거리며 배려해 주겠다느니, 이해한다느니 말하는 사람들. 인터넷 기사를 보고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죠. 매일 같은 습관을 반복하고, 그게 어그러지면 당황한다던데 진짜야? 사진을 찍듯이 풍경을 순식간에 기억할 수 있다던데 진짜야? 아니에요. 완전히 틀렸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과 달라요. 설령 진단명이 같은 장애라 해도 어려움을 겪는 문제도,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하는 일도, 저마다 다 달라요." -143쪽
쓰고 싶은 글은 떠오른다. 다만 그것을 글자로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잇 짱은 글을 못 읽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못 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글을 '쓰는' 행위에 다른 사람의 몇백 배나 되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173쪽
억울한 사건이나 타인의 비상식적인 언동을 목격했을 때, 언제나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믿을 수 없어"라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 말 한마디로 바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선을 그을 수 있다. 나는 저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안심할 수 있다. -283쪽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존재하는 줄은 인식하고 있었어도, 우리 모두가 타인에게 언제든 사소하게 저지를 수 있는 미세한 폭력을 섬세하게 비추는 데 있다. 우리가 결코 한 사람의 인간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 역시 아플 정도로 실감하게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기슭에 선 사람은, 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요세는 물밑에 가라앉은 돌이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강조차도 모르는 돌이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도. -305쪽


누구에게든 선뜻 추천할 수 있는 적절한 소설을 오랜만에 찾아낸 기분이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여기에서 적절하다는 표현은, 쉽게 잘 읽히지만 던지는 메시지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시대에 적절한 이슈와 질문을 모두 담고 있다는 의미다. 데라치 하루나의 모든 소설을 찾아 읽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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