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때나 아무데나 무생채
드디어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삼남매 여러분.
너덜너덜해졌던 엄마는 이제 연휴의 끝이 보인다는 사실에 마치 경칩을 맞은 개구리처럼 팔딱 살아나는 중이야.
그간 입은 또 얼마나 기름기에 절어 있었는지. 맛은 있지만 명절 음식이라는 게, 그렇잖아… 위장을 기름에 푹 담가 조물거렸다가 빼낸 것처럼 무겁고 질척한 느낌. 음, 상상하다 보니 영 별로 상쾌하지 못한 이미지의 연속이라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명절 음식이 맛있는 것만큼은 부인하지 못할 것 같아. 어쨌든, 조금 일상적인 식탁으로 돌아가 볼까.
입맛을 산뜻하게 올려주는 데는 역시 약간 새콤한 맛이 도는 게 제일이지 싶어. 실제로 가스렌지 주변이나 싱크대 위에 앉은 가벼운 기름때는 식초에 잘 지워지거든. 엄마한테 이 말 들었다고, 나중에 식초 부어봤는데 잘 안 지워지거든? 하고 씩씩거리면서 항의 전화하면 안 된다? 묵은 기름때가 아니야. 엄마는 분명히 가벼운 기름때라고 얘기했어…
그리고 이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얘기인지는 저언혀 모르겠고, 그냥 청소할 때도 그러니까, 왠지 기분상 초무침 같은 반찬이 이런 명절 끝에 유난히 잘 넘어가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지레짐작을 해. 그러니까 오늘은 전혀 어렵지 않고, 간단한 반찬을 만들자.
이런저런 이유로 무는 대부분의 냉장고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쓸모가 많다는 점에서 특히 무는 항상 당당하게 허리에 손! 한 채로 이 몸을 불렀냐! 하고 으스댈 것 같단 말이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을 텐데, 그 무를 꺼내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로 잘라서, 이제 이걸 곱게 채를 썰자. 뭐 할 건지 알겠지? 맞아, 먹을 때는 참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이상하게 자꾸 젓가락이 가는 무생채. 그런데 고추장 한 스푼 떠 넣고 계란 프라이 하나 부쳐 넣고 비벼 먹으면 간단하고 훌륭한 한 끼를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큰 공을 세우는 바로 그 무생채.
채를 쉽게 써는 방법은 동그랗게 납작한 원기둥 모양으로 잘라낸 무를 다시 이등분을 해서, 납작한 면을 도마에 대고 세워줘. 그리고 이제부터 채를 썰면 돼. 참 쉽죠. 아, 이게 아니지.
채썰기는 나름 고급기술이긴 하지만 왼손의 퇴각과 오른손의 전진속도만 맞춰주면 별 대수는 아니야. 써놓고 보니 이 무슨 ‘간은 적당히’ 같은 무책임한 발언인가 싶긴 한데 뭐 어쩌겠니. 요리는 지름길이 없어. 경험치를 쌓아야만 느는 드물게 정직한 일 중 하나야. 안타깝게도 치트키는 없다. 그러니 괜히 옆으로 눈 돌리지 말고, 다시 칼 들자.
느릿느릿 썰어도 괜찮은데 가능하면 곱고 가늘게 썰어주면 좋겠어. 그래야 빠른 시간 안에 간이 잘 배기도 하지만 씹는 맛도 좋고 보기도 좋…지만 영 못해먹겠으면 그냥 덤벙덤벙 두껍게 썰어서 안 될 건 없어. 그저 다음 끼니에 먹어야 하는 아주 약간의 애로사항이 발생할 뿐이야.
다 썰었으면 일단 칼 놓고 자축하는 뜻에서 박수 한 번 치고 가도 돼.
경건한 박수 끝났으면, 이제 볼에 옮겨 담고 소금 아주 약간에 절여서 버무려도 되고, 입안에 짝 붙는 맛이 좋으면 까나리 액젓 같은 걸로 해도 되는데 선택은 늘 그렇듯 먹는 사람의 몫이겠지?
여기에 설탕 조금(실패해도 괜찮아, 실패를 해 봐야 늘어), 고춧가루는 조금 넣어도 되고 넉넉하게 넣어도 되는데 버무려 보면서 마음에 드는 색깔에서 멈춰보는 걸로 원하는 맛을 찾아도 괜찮아. 그리고 다진 파와 마늘, 통깨 옵션 정도 추가해서 버물버물.
한 가닥씩 집어 먹어보고 무슨 맛이 모자란 지 갸웃 생각도 해 보고. 그렇게 또 하나 배우는 거지 뭐.
엄마 자랑인데, 엄마가 처음 시집와서 명절 때 할머니 앞에서 채를 써는데 너희 친할머니가 엄마 칼질하는 거 보고 혀를 내두르시지 않았겠니. 너처럼 채를 곱게 써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때 엄마는 이 말을 할까 말까 제법 고민했어.
엄마가 그토록 능수능란한 완성형 칼잡이(?)가 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목업(mock-up)을 만들어야 했던 학부생과 원생 시절 동안 무수히 여러 차례 손을 갈라 먹고 기우며 쌓아 올린 고통의 경험치 덕분이었다고. 역시 안 하길 잘한 것 같아, 그렇지?
근데 이렇게 온갖 척을 다해놓고 사진을 보니까 이건 뭐 숫제 도끼질한 모양새라 어깨가 겸손해지는 중이야... 얼마전 겪었던 손바닥 골절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탓일 거야,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