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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r 26. 2024

일요일의 커피와 포피

1.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4)

“교수님, 강의계획서 두 부 모자라는데요.”


과대표인 듯한 학생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앉아서 소리를 지르는 거지, 학생이 당연히 받으러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잠시 했지만, 윤소은은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여유분 있는데. 학생이 와서 좀 가져가 주겠어요? 내가 현기증이 좀 있어서요.”


키가 제법 큰 남학생이 벌떡 일어서서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순간 움찔 물러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다독인 그녀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계획서 여유분을 내밀었다. 그녀의 섣부른 오해와는 달리 남학생은 씩 웃으며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갔다. 잠깐이지만 거칠게 휘저어졌던 마음이 이내 순하게 가라앉았다.


“우와, 빡빡해.”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던 풋풋한 기가 채 가시지 않은 여학생이 옆에 앉은 친구의 귓전에 대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윤소은은 잠시 신입생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또 잠시 울렁거렸다.


“네, 맞습니다. 제 강의는 빡빡해요.”


와르르 웃음이 터지고 여학생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윤소은이 절로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당연히 그래야죠. 여러분은 보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그 힘든 경쟁을 뚫고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인걸요. 안 그런가요?”


이번에는 마지못한 대답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더듬더듬 고개를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속이 들여다보일 일인가, 하고 내심으로 생각한 윤소은이 허리를 곧게 폈다. 아직은 조금 힘겨운 자세였다.


“어떤 학생들은 자력으로 힘겹게 학비를 대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부모님께서 뒷바라지를 해주고 계시겠죠.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아요. 그러니 주어진 시간 안에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습득해야 할 겁니다. 인생에서 최고로 열심히 살아야 할 때예요.”

“공부만 하면 취업 준비는 언제 하고 연애는 언제 해요?”


느닷없이 뒤에서 터져 나온 귀여운 불만에 윤소은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해도 돼요. 친구와 원껏 놀고, 좋아하는 사람을 바꿔가며 카사노바처럼 실컷 연애만 해도 돼요.”


오오오,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학생들과 함께 웃던 윤소은이 느닷없이 정색을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인생은 여러분이 택하지 않았던 쪽에 대한 무거운 후회를 반드시 하게 만든답니다. 그러니 원 없이 치열하게 살도록 하세요. ‘치열하게’가 수식하는 목적어를 무엇으로 둘지는 여러분의 몫이죠. 하지만, 먼저 이 길을 걸어봤던 선배로서 조언하자면…”


윤소은이 의도적으로 말을 끊고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래봐야 뻔한 이야기밖에 더 하겠냐는 듯 시큰둥한 학생이 절반, 의욕에 가득 차 반짝거리는 눈을 한 학생이 나머지 반이었다. 윤소은이 마침표를 찍는 기분으로 말을 맺었다.


“먼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직업적 성취인지, 다정한 인간관계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 자, 그럼 오늘은―”


건강 문제로 원치 않게 오래 쉬었다지만, 유일하게 자신 있는 일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긴 휴직 기간을 가졌다는 것을 학생들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윤소은은 만족스러웠다. 그녀에게는 짧았을, 학생들에게는 길었을지도 모를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앞다투어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윤소은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업 초반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새김질하던 그녀의 입가에 맥없는 웃음이 스몄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조언이랍시고 그런 말을―’


이 도시에 속한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딱 백 일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 석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동네와 많이 안면을 익혔는가 하면, 민망하게도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웠다. 윤소은은 사람에게도, 장소에게도 쉽사리 정을 붙이는 성격이 못 되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제외하면 그나마 친근하다고 할 수 있는 장소가,


‘아, 카페.’


윤소은이 피식 웃었다. 까탈스러운 사장 덕분에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있던 카페여서 한 번쯤 들러봐야지 마음먹고 있긴 했지만, 기실 윤소은이 카페 Espressive-C에 정을 붙인 것은 카페의 본질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였다.

카페의 서쪽 건너편에 있는 동물병원. 포피 동물병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그 병원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바다가 시원스레 보이는 2층 남쪽 창 앞의 자리를 선호하는 손님들을 피해 1층에 자리를 잡은 윤소은은 동물병원 간판을 본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윤소은은 자신의 건강한 생명력을 주변에 퍼트리는 것들을 좋아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윤소은의 상념이 자꾸자꾸 생각의 꼬리를 물고 왜, 왜, 왜를 되짚어 내려가는 동안, 그녀 자신의 삶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유로 강제 급정거를 당했던 서른두 살 때의 날벼락같은 기억이 가슴 아래까지 찰랑찰랑 수위를 높였다. 누가 봐도 잘 닦인 고속도로처럼 쭉 뻗어있던 그녀의 창창한 미래가 암 2기 진단과 정면 충돌한 것은 과연 누구의 과실이었을까.


그때까지 쌓아 올린 모든 노력이 산산이 부서졌던 때부터, 뭘 저렇게까지 기를 써야 하나, 하는 동정과 싸워가며 간신히 되찾은 미래 ― 그것도 과거의 자신이 공들여 쌓았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미래의 조각이나마 다시 손에 쥐게 되어 간신히 주변에 관심을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윤소은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산책길에 만나는 강아지들이었고, 화원 앞에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화초들이었다. 그 작은 생명들이 자신에게 어떤 위로를 건넸는지 윤소은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지만. 아니, 오래전엔 있었던가.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영원히 행복하게,를 믿었던 시절 존재했던 인연이 떠난 그림자가 남아있던 자리가 도톰하게 아물 정도의 세월이 흘렀음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또 쓴웃음이 났다.

근사한 커피도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 까불거리는 귀여운 생명체를 항상 볼 수 있다는 점이 카페 Espressive-C의 가장 훌륭한 점이었다. 적어도 윤소은에게는. 무언가를 고정적으로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생의 크나큰 활력소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 윤소은의 삶은 너무나 바쁘게 구르고 또 굴러왔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불행이 그녀를 강제로 멈춰 세우기 전까지는.


‘일요일의 커피와 강아지. 아니다, 일요일의 커피와 포피.’     


아무렇게나 중얼거려 본 말이 뜻밖에 기막힌 각운을 빚어 그 말을 머금고 있는 동안 윤소은의 기다림은 조금 더 리드미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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