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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미나인 Oct 08. 2021

포옹에 관해

그 희박한 확률




 사람을 포옹하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한 명 이상은 무리가 있는 것 같죠. 양 팔에 두 아이를 함께 껴안아 주는 것까지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요. 예를 들어 여러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을 보고 포옹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한 사람은 평생에 걸쳐 몇 명과 포옹하고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요. 인사치레로 하는 포옹을 포함한다 해도 그 수에 절대적인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리 핵인싸라 해도 말이에요. 몸을 맞대는 행위는 평생을 쪼개어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도하더라도 고작이라고 일컬여질 만한 수만큼 가능하리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요. 그토록 가까이 존재하는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유의미할 정도로 희박한 확률을 일컬어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르니까요. 그러니 진심을 꺼내보려 할 필요 없는 걸지도 몰라요. 꽉 부여잡은 한 번의 악수만으로도 우리는 알아채야만 하니까요. 이 순간이 결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리라는 걸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할 수도 있어요. 그냥 심플하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때요. 지금 곁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이 현재 저를 살아있게 하는 숨결이란 걸요. 아무리 그래도 타자를 실감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물리적인 감각만한 것이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에게는 결국 포옹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거에요. 그 때마다 알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게 아니라 누구보다 가까이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그 순간의 생을 빚졌다는 걸요. 꽉 껴안을 수록 저라는 존재가 허구가 아님을 진실로 실감할 수 있겠죠. 삶은 결국 저를 비춰주는 타자가 없으면 성립 불가능한 거잖아요. 저는 그 순간 가장 가까이에서 성실히도 저를 비춰주는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까요. 그 사람은 우주처럼 일렁이는 눈동자에 저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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