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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미나인 Nov 12. 2021

표정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나요

캐릭터의 힘




 사람은 사람에게 참 강력한 것. 오랜만에 글을 쓰는거라 대충 써야겠다. 지금 너무 졸려서 아마 내일 수정이 번잡하게 이뤄질지도 모른다. 항상 이럴 때 되려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을 선호하고 만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 생명을 지닌 유기체 대부분은 외부 자극을 수용하는 핵심 기관들을 꽤나 한 곳에 밀집시키게 됐던 것 같다. 이를테면 동물의 경우엔 얼굴 말이다. 생각해보면 눈코입이 제각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정말이지 비효율적이긴 할 듯. 대부분의 동적인 생물들은 우리가 얼굴이라 부를만한, 감각 수용 기관들이 모여있는 그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 얼굴이라는 것에 매 순간 엄청난 영향을 받곤 한다. 심지어 표정을 흉내만 낸 이미지들에도 기어코 적잖은 영향을 받고야 만다. 이모티콘이나 캐릭터 하나로 순식간에 무드 자체가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는 얼굴이라는 공간 자체가 단순히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듯하다. 이렇게까지나 영향력이 있다면, 순전히 내 생각에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캐릭터도 그 긍정적 사례임에 틀림없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나라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탈각하면서 전체 모양을 유지하곤 한다. 나라는 세상은 끔찍히 많은 미생물들의 우주다. 내게 유기체란 항상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이다.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그 모두가 사실은 그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점멸(깜빡임)들로 구성되는 건지 상상해보라. 그 외곽은 유려하게 그려진 단순한 선이 아니라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역동성 그 자체. 그로 인해 생명의 유기적 구성품을 벗어나 독립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단단히 쟁여놓는 의지. 다시 말해 생명 그 자체다. 의지는 생명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는 생명체에게 생명을 유지한다는 대전제가 바로 벗어남과 묶어놓음이라는 반대 급부들의 끊임없는 알력 자체, 변화 그 자체 임을 말해준다. 우리 모두에게 유일하게 당연스러운 것은 오직 변화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생명에 반하는 구성의 역동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이 부서질 듯이 뛰쳐나가려는 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구심점에 있기 때문. 그것이 변화들을 인지하고 포용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통일된 개체가 되기 때문. 이는 애초에 존재란 쉽사리 부서질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구성품이지 않고자 하는 것들 또한 우리의 일부이기에 말이다. 그것들이 변화를 주도하지 않는다면 반대 급부의 힘은 생기지 않을 것이며, 그 순간 유기체가 아니게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듯 부분은 전체이며, 전체는 또한 부분이기도 하다. 변화는 생명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우주는 한 개가 아니다. 다중우주는 우리 앞에 타자라는 이름으로 시시각각 현존한다. 그들 모두가 끊임없는 역동성에 의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거대한 공간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중에 우리 모두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위험을 탐지하고, 환경을 지각하고, 타자를 감각하기 위한 공간. 이는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타자에게 작동하는 바로 그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서로가 있기에 비로소 유기체적 실체를 띠듯이 타자가 있기에 우리는 반응하고 비로소 존재 이유를 찾는다. 그래서 얼굴이란 것은 그토록 많은 양의 메시지들을 지치지도 않고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안 그러면 나의 삶과 운명이 타자의 표정에 좌우되고 마는 것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없을 테니깐. 여기까지가 예전에 쓴 글이다. 오늘 여기서 약간 덧붙이면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브랜딩을 하면서 캐릭터를 만들려고 한다. 속눈썹이 아주 풍성해서 그 눈빛을 가려버려서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캐릭터다. 평소에는 졸린 듯한 표정이지만 상대를 위해 일부러 다정한 표정을 짓고는 한다. 하지만 그 의도를 알지 못하면 그 캐릭터의 다정한 목적이 되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부러 타인에게 연습한 표정을 내비치는 캐릭터. 어쩐지 익숙하다. 우리의 모습이다.


 이 캐릭터는 타인을 향한 나의 마음을 담아 제작할 생각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꿈꾼다. 그 간절한 바람을 캐릭터로 구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상 속에서 탄생한 캐릭터가 품고 있는 표정들이 작위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타인의 작위적인 배려를 통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토대를 얻게 되는 것 아니던가. 그렇다. 모든 것은 반대급부가 있기에 비로소 구성될 수 있다. 당신에게 이렇듯 얼핏 보면 부자연스러운 배려와 사랑이 필요한 순간들이 온다면 애쓰지 말고 내게로 왔으면 한다. 당신의 작위적인 노력은 이 캐릭터에게 다 내맡겨버리고, 당신이 타인에게 하던 노력을 이제는 온전히 되돌려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당신의 배려가 다시금 당신에게 되돌아갔을 때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타인에게 실천했던 행위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 지 말이다. 그리고 이젠 그 노력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배려가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약속하고 싶다. 이 캐릭터는 결코 당신을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라고 말이다. 단지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이라고 말이다. 누구든 사랑을 받다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익숙해지고야 말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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