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자> 비평
*영화 <프랑스 여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창 너머 술집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동석한 프랑스 남자에게 화가 난 여자는, 그가 소개하는 다른 여자를 보더니 화장실로 간다. 거울 앞에 선 그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불이 깜박거리다가 꺼진다.
영화의 본격적인 리듬은 바로 이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시작한다. 그 이후로 여자는 마치 그녀가 한국에 돌아온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환상이었음을 드러낸다. 말미에 다다르기 전에도, 잔해에 짓눌려 점점 피멍으로 물드는 그녀의 등과 현재로 여겨지는 일상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과거의 잔상들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다시 프랑스 술집 화장실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것이 그녀의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그 이후로 한국 술집 화장실에서 그녀가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과거를 끄집어내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과거를 외면하는 그녀에게 과거가 현재로 침범하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거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그녀는 과거와 이어진 공간을 찾아간다. 술집 화장실, 갤러리, 아버지의 묘. 그리고 그녀는 꽤 자주 해란을 언급한다. 이 모든 게 미라의 환상이라면, 화장실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여정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을 함축하는 것일 테다. 과거 자체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니면 그녀가 과거를 불러와야만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미라는 화장실과 거울에 비친 포스터로 시작해, 호텔 침대 위에서 깨는 것으로 과거로의 여정을 마친다.
그러나 이 규칙은 앞으로도 보일 과거로의 여정에 적용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과거로 돌아갈 때, (그때 화장실 벽에는 하녀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과거의 영은과 해란의 말싸움을 지켜보다가 현재의 영은과 성우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과거가 중단된다. 과거로의 여정이 갑작스레 끝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성우와 호텔에 들어갈 때 미라는 죽었던 고양이 나비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이때 성우가 밖으로 나가는데, 제아무리 미라가 갑작스럽게 몸을 뺐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나가는 모습은 무언가 어색하다. 그리고 미라는 나비를 찾는데, 이는 호텔이라는 공간에 과거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하녀 옷을 입은 해란이 나타나더니 미라를 깨운다. 여기에서 그녀가 깨는 순간은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가 그녀를 깨움으로써 다시 과거로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천둥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덕에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제 그녀가 깨는 순간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해란이라는 과거는 그 이후로도 호텔을 찾아온다. 갑자기 비에 젖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올 거야.’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미라의 머리를 욕조로 처박기도 한다. 호텔 밖에서는 미라가 과거의 공간을 찾아 나서고, 과거의 인물을 언급하며, 또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회상한다면, 호텔 안에서는 과거의 해란이 그녀를 잠에 들지 못하게 만든다. 호텔을 찾아오는 해란은 미라를 괴롭히러 온 망령인 것일까?
죽음
이제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자. 영화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마주하는 모습보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부재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나비가 죽었을 때 과로로 병원에 입원한 미라, 해란이 죽었을 때 프랑스에 있었던 미라, 그리고 죽기 전 해란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영은.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은 본인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 때문에 호텔을 침범하는 해란은 죽은 해란의 망령이라기보다는 미라의 죄책감에 가깝다. 그럼에도 호텔 밖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끄집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해란에게 상처가 되었을 성우와의 관계를 점점 발전시키는 모습은 다소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한다.
성우를 호텔로 데려올 때, 화장실에서 쥘이 나타난다. 미라가 쥘과 싸울 때, 그녀는 과거의 해란이 가졌을 심경을 대변한다. 바람피운 배우자에 대한 분노. 그래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성우를 보다가 오른편을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은, 해란이에 대한 미라의 속죄이지 않을까? 오른편을 보는 미라의 모습이 나온 후에 카페에 앉아있는 해란이가 나온다. 미라는 해란을 응시하는 걸까? 이때 카메라가 뒤로 가더니 해란을 등지고 서있는 미라를 비춘다. 미라는 해란을 응시하면서 동시에 해란을 등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미란은 자신의 외면, 회피를 응시한다.
재난
마지막에 미라가 프랑스 화장실에 서 있을 때, 화장실은 다시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가 되는가? 오히려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무너진다. 미라는 죽음을 마주한다. 나는 여기에서 갑작스러운 단절감을 느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 그녀가 관계 맺었던 과거의 사람들. 관계 맺음에서 비롯된 정념들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거라는 사실. (무엇보다도 이 장면이 주는 충격은, 21세기에 느닷없이 찾아온 재난을 겪은 우리 세대의 상처를 은유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간에 미라가 누웠던 세월호 부스는 우연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
영화가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화장실을 기점으로 한 어떤 미래와 어떤 과거다. 이들의 특징은 재난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재난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시간축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물론 이 시간축에서도 죽음이라는 어떤 재난이 분명히 존재한다.) 마지막에 화장실이 무너지는 순간은 그러한 시간축을 꺾어버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해왔던 현재는 이제 과거에만 머물게 되어버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미래는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미라는 지속적으로 잃어버린 미래를 끄집어내고, 거기에서 과거에 갇혀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축 속에서 단절되어버린 반추와 성찰을, 환상을 통해 진행하는 것이다.
잔해에 깔린 미라에게 해란이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넨다. 사람들이 올 거라고. 어쩌면 죽음 앞에 부재자였던 그녀가 느낄 두려움은 자신의 죽음 앞에 도래할 사람들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재난을 겪은 당사자가 느낄 지독한 외로움. 그러나 해란은 그녀에게 부재가 아닌 사람을 말하고 결국 사람들은 도착한다. 그리고 잔해 밑에서 그녀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영화가 지속적으로 죽음을 드러내고 단절을 체험시켰다면, 마지막 샷은 그것을 넘어선 그녀의 각성으로 보인다. 물론 그녀의 눈빛이 사랑해왔던 사람들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아직 봉합되지 않은 갈등을 이제 해결할 수 없다는 공허함과 처연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면해왔던 그녀가 성우가 아닌 카페의 해란과 자기 자신을 응시했던 것처럼, 그녀는 이제 카메라를 처음으로 직시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외면해왔던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잃어버린 미래와 과거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곱씹으며,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맞이해야만 하는 낯선 시간축을 의연히 마주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