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미 인> 비평
* 영화 <렛 미 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몹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통상적인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공포감과는 다른 다른 종류의 공포감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점프 스케어가 없다거나, 잔인한 장면이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캐릭터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차이인 것 같은데, 일반적인 공포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의 희생양이 되거나 그것에 맞서는 사람이 되는 반면, 렛미인에서 주인공은 그런 존재와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칼에 이입하면서도 동시에 잔잔한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섬뜩함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소외된 사람들
먼저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오스칼은 변변찮은 친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학교에서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또래는 그를 괴롭히는 친구들 뿐이다. 그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안에서 소외된 사람이며, 또 주위의 괴롭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거기에서 그는 복수감을 키우며 살인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된다.
반면 이엘리는 살인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살인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인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기에, 또 낮에 햇볕을 받으며 생활할 수 없기에,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오직 밤에만 활동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식적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들어야만 타인의 공간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잡아먹는 그가 사람의 초대를 받는다는 건 어려워 보인다.
오스칼과 이엘리는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각자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오스칼은 제도 안에서 은밀하게 발생하는 부조리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엘리는 제도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조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스칼의 소외감이 제도권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소외감이라면, 이엘리의 소외감은 기존의 제도를 허물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소외감이다. 그래서 오스카와 이엘리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으로부터 빚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제도권 안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몹시 위태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위태로움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제도와 부조리
당장 오스칼이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을 돌이켜보자. 거기에는 오스칼이 드디어 강자에게 맞서게 된 것에 대한 쾌감보다는, 갑자기 얼음 아래에서 발견된 시체로부터 비롯되는 서늘함이 있다. 수영장에서 오스칼이 괴롭힘을 당하는 순간에서도, 이엘리의 응징은 입을 벌어지게 만들면서도, 응징 이후 롱샷으로 비치는 잔혹한 풍광으로부터 비롯되는 으스스함이 있다. 갈등으로부터 오스칼이 벗어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용납될 수 없는 살육이 함께 했었다.
물론 처음엔 위태로울 것도 없이 그저 무섭고 섬뜩한 장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이를테면 이엘리와 동거하는 남성이 초반에 살인을 하는 장면은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기절시키고 피를 뽑는 이 모든 행위는 횡적 공간에서 발생하고, 카메라는 이 공간을 제법 멀리에서 담아낸다. 어떤 섬뜩한 행위를 관객에게 들이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관객은 깊게 공간을 형성하는 나무들 사이에서 이러한 행위를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숨죽이며 보게끔 하는 담담한 카메라의 시선은 강아지와 동행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중단된다. 이러한 리듬이 탁월하게 무서우면서도, 이 시퀀스에서 확실히 나쁜 사람과 무고한 사람이 누군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엘리가 다리 아래에서 어느 남성을 살인하는 장면은 점프 스케어 효과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피해자에 이입하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을 따르며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시한다.
카메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은 라케가 있는 순간일 것이다. 후반부에 라케의 애인이 도망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라케를 들여다보고 애인을 분주히 쫓는다. 라케에 이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해가 벌어지는 순간의 카메라는 이엘리에 초점을 더 맞추기는 하지만, 분명 영화는 오스카와 이엘리 다음으로 라케의 이야기에 나름대로 이입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케는 지극히 사회 친화적인 인물이다.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것으로 보이고, 새로 이사 온 남성에게도 적극적으로 손을 건네기 때문이다. 그는 제도 안에 있으면서도 타인을 들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오스칼과 이엘리 다음으로 비중 있게 서사를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친구를 잃었고 자신의 애인을 잃었다는 점에서, 라케가 이엘리를 찾아 커튼을 걷어내려 하는 행동은 그럴만한 행동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라케로부터 거리를 둔다. 칼을 든 오스칼의 외침으로 라케의 시선은 중단되고, 카메라는 욕실로부터 천천히 멀어진다. 복수심으로 찾아온 라케는 결국 응징당하게 되고, 라케의 피를 매개로 오스칼과 이엘리는 키스를 나눈다. 다행이다 싶기도 하면서도 섬뜩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준 이엘리를 구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면서도, 제도권을 침범한 부조리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스를 나누고 이엘리가 떠남에도, 오히려 이엘리는 비로소 오스칼에게 들어왔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기꺼이 오스칼의 주위를 서성거리지 않고서는, 이엘리가 수영장의 오스칼을 도와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영장에서의 시간조차 오스칼을 둘러싼 부조리를 응징하는 것에 대한 통쾌함은 전혀 없다. 오히려 영화는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오스칼이 물에 잠겨있는 동안,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잠깐씩 비춰준다. 그걸 보면서 그들에게도 변화의 여지는 있지 않을까, 오스칼도, 그를 괴롭히는 아이들도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모두 벗어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이엘리는 그들의 생을 처참하게 끝내버린다. 거기에는 제도권 안에서 고민해보고 행동해볼 법한 여러 여지들이 다 끊겨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절레서 느껴지는 허무함이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느낀 잔잔한 섬뜩함이 아닐까 싶다.
벽을 넘어 옆을 보는 것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오스칼은 저항하기 힘든 어떤 부조리를 맞이할 뿐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엄마나 선생님한테 알리고 가해자들을 멀리 보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시절엔 학교생활이 전부라고 여겨졌을지도 모르고, 교묘하게 가해자들로부터 가스 라이팅을 당해왔을 것이다. 오스칼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겠지 싶다. 이엘리에 대해서는 영화가 많은 걸 보여주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사회와 고립되고 사람의 피를 마셔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엘리에게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단지 영화가 제도권으로부터 벗어나는 으스스함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아름답고 시적이며, 오스칼과 이엘리에 이입하게 만드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매력이, 오스칼과 이엘리를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오스칼과 이엘리가 소외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또 동시에 난데없는 부조리를 맞이한 오스칼처럼 이엘리도 또한 부조리를 맞이한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흡혈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보호자의 보호를 받아야 할 12살 나이에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흡혈귀로부터 벗어난 생존자이다. 다만 그의 생존조건이 바뀌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현실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엘리의 존재를 납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엘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라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라케와 이엘리가 관련된 장면에서 대체로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를 쳐다본다. 가령 이엘리에게 살해당한 친구를 찾을 때에 그는 눈밭을 뒤졌고, 복수를 위해 이엘리를 찾아 나섰을 때에도 그는 욕조에 덮인 이불을 걷었다. 이렇듯 제도권의 라케에게 이엘리의 존재는 덮개를 걷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제도권 바깥을 겉도는 존재이다.
반면 이엘리와 오스칼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다르게 작동한다. 서로 옆집 이웃인 이엘리와 오스칼이 처음엔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그저 아파트 벽의 두 창문을 나란히 비춤으로써, 이엘리와 오스칼의 횡적 공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카메라가 그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이 있다. 사탕을 사준 오스칼을 위해서 기꺼이 사탕을 먹고 구토를 하는 이엘리를 보자. 이때 카메라는 건물 뒤편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비춘다. 그동안 카메라가 보여주었던 횡적 공간과는 성격이 다르다. 같이 하룻밤을 잔 이엘리를 찾는 오스칼을 보여주기 위해서 카메라는 그들의 아파트를 측면에서 비춘다. 이 각도의 변화는 초반부에 보였던 횡적 공간과 다르다. 거기에서 나는 단절되었음에도 기어코 곁을 들여다보겠다는 시선을 본다. 제도권 바깥을 겉도는 존재는 정말로 제도권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얼굴을 내밀어 옆으로 돌리는 순간 마주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엘리의 존재는 분명 부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부조리의 연쇄를 끊어내야 한다면 우린 무얼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아래에 묻힌 존재를 찾아내는 제스처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곁에도 어떤 부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벽을 넘어 옆을 쳐다보는 것. 그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온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으스스함에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건 바로 이런 온도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