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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근 Jun 04. 2019

대만의 역사가 시작된 곳, 타이난(臺南)!

 네덜란드와 정성공의 흔적들

역사를 사실(事實)과 사실(史實)로 구분할 때 대만의 역사(歷史)는 얼마나 될까? 대만에 인류의 자취가 남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 말기인  5만년 전 ~ 1만년 전 부터로 추정하지만, 기록으로서 역사는 400년에 불과하다. ‘대만(臺灣)의 남쪽’이라는 뜻을 지닌 타이난(臺南)에서 ‘대만 400년사’는 시작 되었다.


  타이난에서 대만 역사의 첫 장을 연 것은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이 ‘붉은 머리칼의 사람’이라는 뜻을 담아 홍모인(紅毛人)이라 불렀던 네덜란드인들이다. 이들은 이곳에 지란디아(Zeelandia, 중국명  熱蘭遮城)라는 요새를 구축, 대만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면 왜 대만 역사는 홍모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일까? 의문의 답은 서양사에 ‘대항해시대’로 기록된 15세기 유럽에 있다. 지극히 서구적인 관점이지만,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혹은 ‘신항로 개척’ 시대로 정의 되는 이 시기, 서구 탐험가들을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새로운 땅을 찾아 대양을 누볐다.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아메리카의 어원이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등이 당시 대표적인 탐험가들이다.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는 이베리아반도에 나란히 자리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이웃나라들이 대개 사이가 좋지 않듯, 아웅다웅하던 이들은 지구촌 곳곳의 이른바 신개척지를 두고도 부딪혔다. 그러다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Papa Alessandro VI)의 중재로 조약을 체결, 서경 43도 37분을 경계로 지구의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영유하기로 결정하였다. 1494년 스페인 북부도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체결한 ‘토르데시야스조약’이다.

  조약 체결 후 포르투갈은 세력을 동쪽으로 뻗어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동방견문록』에서 ‘황금의 나라’로 소개한 ‘지팡구(일본)’에 다다랐다. 지팡구로 가는 동방항해로 상에서 포르투갈 선원들은 녹지로 뒤덮인 아섬을 발견하고 이리 외쳤다. “일랴! 포르모사(Ilha Formosa, 아름다운 섬이여!)”. 이로서 대만은 서양인들에 의해 기록으로서 역사가 시작 되었다. 1590년의 일이다.

  포르투갈이 처음 발견한 땅이지만 지배자가 된 것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정부로부터 해외 식민지 개척과 통치의 전권을 부여 받은 연합동인도회사(일명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24년 타이난 지역을 점령, 요새를 쌓아 대만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원래 이름은 오렌지시(Orange City, 奧倫治城), 네덜란드연방공화국 초대 총독 오렌지공 빌렘 1세(Willem I )를 기념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10년 공사 끝에 완공된 성채는 훗날 네덜란드 남부 주(州)이름을 따서 지란디아(Zeelandia, 영어명 Zealand)라고 불리게 된다. 오늘날 안핑고보(安平古堡)다. 지란디아 요새를 쌓은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어 음차 표기로 ‘다위안(大員)’이라 부르던 대만 통치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오늘날 자카르타)에 아시아본부를 두고 있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주대만 행정장관을 파견, 대만 통치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1624년 첫 장관 송크(Martinus Sonk)가 부임한 이래 1656년 마지막 행정장관 코예트(Frederik Coyett)까지 총 13명의 주대만행정장관이 지란디아에서 38 간 대만을 통치 하였다. 다만, 당시 네덜란드의 통치 범위는 타이난을 포함, 대만 중남부 지역에 한정 되었다. 

  지란디아요새를 쌓아 대만 통치의 거점을 마련한 네덜란드인들은 이른바 플랜테이션 농업정책을 실시, 대만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 하였다. 이를 위해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중국 본토 푸젠(福建)성과 광둥(廣東)성으로부터 대규모 한인(漢人)이주가 시작 되었다. 대만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과중한 소작료 문제로 네덜란드인 지배자들과 갈등을 벌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중 1652년 발생한 곽회일(郭懷一) 사건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한인항쟁사건으로 4000~5000명의 한인 농민들이 반란에 참가 하였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우세한 화력에 힘입어,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은 소수로서 다수를 지배해야 하는 딜레마에 마주하였던 네덜란드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졌다. 이는 새로운 요새 건설로 이어져 1653년 역시 네덜란드의 주 이름을 딴 프로방시아(Provintia)성채를 세우게 된다. 

  지란디아와 프로방시아라는 2개의 성채를 세운 네덜란드는 대만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 한편, 중국-일본-동남아시아를 잇는 항해로상에 자리한 대만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 대만을 중계무역지로 발전 시켰다. 당시 플랜테이션 농업과 

중계무역을 통해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올린 이익은 막대하여, 한때 동인도회사 전체 수익의 26%에 달할 정도였다.

  이처럼 네덜란드가 ‘동인도’라 부르던 인도네시아와 더불어 대만 지배를 다져가고 있을 무렵, 중국 본토는 다시금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왕조 명(明)은 만력제(萬曆帝) 재위기에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1620년 만력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창제(泰昌帝)가 뒤를 이었지만 그는 불과 29일 만에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후사는 아들 천계제(天啓帝)에게로 이어졌는데 애초에 그는 황위계승과정에서 소외 되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이런 그는 즉위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는 맡긴 채 자신은 취미인 목공일에 열중 하다, 재위 7년 만인 1627년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천계제는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에 5번째 동생 주유검(朱由檢)에게로 옥새는 전해졌는데, 역사에 ‘명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 숭정제(崇禎帝)다. 

  ‘자금성(紫禁城)의 혼미’ 속에서 안팎의 위기는 계속 되었다. 만리장성 북쪽 끝자락 산하이관(山海關) 밖에서는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이끄는 만주족이 후금(後金)이라 칭하며, 자신들의 조상이 세웠던 나라 금(金)의 영광을 되찾으려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627년 발생한 농민봉기는 날로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새로이 ‘하늘의 아들(天子)’의 소임을 받은 숭정제는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절치부심하였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가 보위에 오른지 17년째 이던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반란군은 베이징을 포위하였다. 그해 3월 19일 반란군이 베이징성을 점령하고, 숭정제는 자금성 북쪽 징산(景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명사(明史)는 277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베이징을 점령한 이자성은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40일 천하’로 끝났다. 이자성이 제위에 올랐을 때, 산하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앞으로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만주족의 군대에 뒤로는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포위된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와중에 이자성이 아버지 오양(吳襄)을 죽이고,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뺏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한 오삼계는 산하이관을 열고 청에 투항하고 만다. 오삼계의 투항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산하이관을 넘게 된 청군은 파죽지세로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여세를 몰아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 하였다. 

  숭정제의 비극적인 죽음과 만주족 군대의 베이징 점령으로 공식적으로 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전국 각지에서 명의 유신(遺臣)들이 왕조의 부활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속에서 이른바 남명(南明)왕조라 하는 유민(遺民)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그중 1945년 6월, 푸저우(福州)에서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후손 주율건(朱聿鍵)이 융무제(隆武帝)로 즉위 하였다. 그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정지룡(鄭芝龍)이다. 남명왕조의 개국공신이 된 정지룡은 본디 해적 출신으로 푸젠성 일대에서 ‘해상왕’이라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융무제는 그와 정씨 일족에게 관직을 하사하였는데, 그 중에는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鄭成功)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성공은 중국,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누비던 아버지 정지룡이 일본에 체류 할 때인 1624년 일본 히라도(平戸島)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다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은 하급무사의 딸이었기에 정성공은 중국인의 피와 일본인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았다. 어린시절 후쿠마쓰(福松)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던 그는 7세 때인 1631년 정지룡의 거성이던 푸젠성 안하이성(安海城)으로 건나가 삼(森)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한 후,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육성되기 시작하였다. 1639년 남명왕조의 수도 난징으로 가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였고, 당대 유학자이자 재상이던 전겸익(錢謙益)의 문학에서 유학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이런 그를 융무제는 특히 총애하여 정성공에게 명 왕실 성인 주(朱)씨 성을 사용할 것을 허락, 그는 ‘왕실 성을 쓰는 어른’이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 불리게 된다. 

  비록 해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학 소양이 남달랐던 그는 충의(忠義)사상에 투철하여, 명 부흥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반면 정지룡은 1647년 청의 회유에 넘어가 반청복명운동을 포기하였다. 청은 정지룡을 인질로 삼아 정성공에게도 투항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샤먼(廈門), 진먼도(金門島) 등을 근거지로 반청운동을 지속하였다. 

  이런 정성공을 고립 시키기 위하여 청은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해안을 봉쇄하여 해상무역을 통해 군자금을 마련하던 정성공에게 타격을 주려 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명 부흥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1659년 명의 옛 수도이기도 한 난징을 함락 시켜 청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 하였고 중국 본토에서의 세력은 날로 위축되어 갔다. 

  중국 본토에서 반청복명운동이 거듭 실패로 돌아가자, 정성공은 눈을 바다 건너 대만으로 돌렸다. 1661년 4월, 대만정벌에 나선 정성공은 400척의 군함에 2만 5천명의 군세를 자랑하였다. 남천녹지(藍天綠地)라는 표현처럼 푸른 녹지가 펼쳐져 있던 대만 해안에 다다른 정성공은 부하들을 바라보며 이리 외쳤다. “이는 자비로운 하늘이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늘은 버림받아 홀로 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나를 이곳 안식처로 이끌어 주셨다.”

  정성공의 공격에 맞선 네덜란드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화력 힘입어 지린디아와 프로방시아 성채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다만 육지에 자리한 프로방시아성채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식수문제였다. 성채의 물은 성 밖 고지에서 흘러 들어왔는데, 이를 안 정성공은 물길을 끊어 버렸다. 이에 프로방시아의 네덜란드 군은 곧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네덜란드군은 마지막 보루 지란디아성에서 농성전을 이어갔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상대적으로 병력 수가 많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정성공군의 약점을 이용 청야(淸野)작전을 펼쳤다. 이에 정성공은 대만에서 흔하던 굴을 고구마 가루에 부쳐 먹게 하여 군량부족을 해결하였는데, 대만 야시장의 별미 중 하나인 커자이젠(蚵仔煎)은 이때 생겨났다고도 한다.

  9개월 동안 이어진 공성전. 쌍방이 기진맥진한 끝에 정성공은 최후의 대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 목표는 지란디아성채 방어의 거점 위트레흐트탑이었다. 정성공군의 28문의 대포는 일제히 위트레흐트탑을 향해 포문을 열었고, 25,00개의 포탄이 탑을 두들겼다. 만 하루동안 지속된 포격으로 탑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탑과 더불어 남아있던 네덜란드군의 전의도 무너져 내렸다. 방어전을 책임진 행정장관 코예트는 정성공에게 강화협상을 제안하였고, 정성공이 이를 받아들여 네덜란드는 18개조의 강화조약에 서명한 후 지란디아성채를 떠났다. 이로서 38년에 걸친 네덜란드의 대만 지배는 종말을 맞았다. 

  비록 절반은 일본인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정성공은 대만에 첫 한인(漢人)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만 전체를 ‘동쪽 수도’라는 뜻을 담아 둥두(東都)라 칭하고 지란디아성을 밍징(明京)이라 개명하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더불어 명의 6부제를 모방, 이‧호‧예‧병‧형‧공의 6관(官)이 중앙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대만섬을 남‧북으로 나누어 톈싱(天興)과 완녠(萬年) 2개 현을 설치, 지방통치 조직을 다졌다.  

  이렇듯 반청복명운동의 기지이자, 자신만의 왕국의 기틀을 잡아 가던 정성공은 대만 상륙 1년여 만인 1662년 6월 39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열대 풍토병이 사인(死因)이었다. 

  오늘날 타이난에는 대만 역사상 첫 지배자로 기록된 네덜란드와 이들을 몰아내고 첫 한인왕조를 세운 정성공이 남긴 자취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타이난시 안핑구(安平區) 샤오중가(效忠街)와 궈셩로(國勝路)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옛 지란디아성채는 안핑고보라는 이름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대만 첫 요새건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정성공의 뒤를 이은 정경(鄭經), 정극상(鄭克塽)으로 이어지는 3대 정씨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청 강희제(康熙帝) 시절 대만이 중국에 복속 된 후에는 대만 방위를 맡은 군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로 1930년 대대적인 보수‧개건 공사를 거쳤다. 붉은 벽돌로 쌓은 요망대, 흰벽에 흑기와를 얹은 말레이스타일의 세관직원숙사(海關宿舍) 등이 들어선 것도 이때의 일이다.  

  안핑고보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성채 외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곳곳이 무너지고 담쟁이 덩굴이 자라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성벽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그 옆에는 서양식 건축물이 서 있는데 지란디아성박물관(熱蘭遮城博物館)이다. 대만 개항(開港)기인 1882년 세워진 세무사공관(稅務司公館)으로 당시 타이난에 주재하던 총세무사의 관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세관클럽(稅關俱樂部)으로 바뀌었고, 1930년 대만총독부가 주최한 ‘대만문화 300년경축대전(臺灣文化三百年慶祝大典)’ 기간 동안에는 사료 전시장으로 사용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45년 대만광복 후에는 안핑구 구청(區公所)으로 사용되다 1978년 타이난시립영한민예관(臺南市立永漢民藝館)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2009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개관, 관람객을 맞고 있다. 

  외벽을 지나 계단을 올라 본성 구역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안평고보 유적 기념비가, 오른쪽에는 정성공동상이 서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옛 세관직원숙사 건물인 안핑고보고적기념관(安平古堡古蹟紀念館)이다. 1975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네덜란드 통치기와 정씨왕조 시대 유물, 옛 지란디아성 모형을 포함 치메이(奇美)그룹에서 운영하는 치메이박물관(奇美博物館)에서 기획‧전시하는 역사유물 등을 볼 수 있다. 회랑식 건축인 기념관 복도 한켠에는 서양인 흉상이 서 있는데, 다름아닌 정성공에게 패해 지란디아성을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네덜란드의 마지막 대만행정장관 코예트다. 

  안핑고보고적기념관에서 해안 방면을 바라보면 중국어로 ‘요망대(瞭望臺)’라 하는 감시탑이 서 있다. 본래 일본인들이 쌓은 요망대 위에 1970년 현재의 높은 탑을 쌓은 것으로 1953년 대만정부가 선정한 대만팔경(臺灣八景) 중 하나인 ‘안핑 저녁놀(夕照)’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네덜란드와 정성공의 흔적이 남은 또 하나의 성채 프로방시아성은 적감루(赤崁樓)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지란디아성의 본디 용도가 통치‧군사 중심시설이었다면, 프로방시아성은 행정‧상업 거점으로 세워졌다. 1653년 완공 당시 완연한 유럽식 성채였던 이곳은 훗날 정씨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민난(閩南)풍 중국 건축물로 탈바꿈하여, 동‧서양이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를 내는 유적으로 탈바꿈 하였다. 

  적감루는 현지인들에게 ‘네덜란드 누각’이라는 뜻의 홍모루(紅毛樓) 또는 ‘벽돌로 쌓은 성’이라는 전자성(甎子城)이라 불렸다. 이런 적감루에는 정성공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정성공이 대만을 정벌하기 전 한 예언가가 이리 말했다. “당신은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성채에서 죽음을 맞이할 운명입니다.” 훗날 대만을 정복한 정성공은 프로방시아성채를 자신의 관저로 정했는데,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성채를 보고 비애감에 젖어 이리 외쳤다. “운명을 벗어나기가 어찌 이리 어렵단 말인가?” 실제, 정성공은 대만을 정복한지 3개월여 만에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성채’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예언이 틀리지 않은 셈이다. 

  정성공이 세상을 떠난 후 적감루는 동녕(東寧)왕국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고, 훗날 대만이 청에 복속된 후에도 그 역할은 변함 없었다. 적감루에서 네덜란드의 흔적이 사라진 것은 1862년의 일이다. 당시 대만 중남부를 강타한 대지진의 여파로 옛 프로방시아성채 건축은 대부분 파괴 되고 만다. 이후 청 말기인 1886년 당시 대만현 지현(知縣) 심수겸(沈受謙)이 문교 진흥을 위하여 적감루 서쪽에 도교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 봉래(蓬萊)와 방호(方壺)에서 이름을 딴 봉호서원(蓬壺書院)을 세워 적감루는 교육기관으로 탈바꿈 하였고, 정씨왕조 시절 세워진 츠간루의 본 누각인 문창각(文昌閣)과 더불어 유교색채가 짙은 장소로 거듭났다.

  적감루의 용도가 크게 바뀐 것은 1895년 시작된 일제강점기 때로 새로운 대만의 지배자가 된 일본인들은 이곳에 군용 병원을 세워 ‘육군위술의원(陸軍衛戌醫院)’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1944년, 1960년, 1965년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복원 공사로 적감루는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고, 1983년 대만 내정부(內政部 : 행정자치부 해당) 1급 고적으로 지정 되었다.

  이러한 유적들과 더불어 정성공의 자취를 볼 수 있는 곳은 연평군왕사(延平君王祠)와 타이난공묘(臺南孔廟)다. 연평군왕사는 1662년 세워진 사당으로 주신(主神)은 정성공이다. 그를 ‘대만의 영웅’으로 떠받든 한인 민중들이 세운 사당으로 타이난 뿐만 아니라 대만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신앙 장소 중 한곳이다. 이런 이곳은 대만이 청에 복속된 후로는 반청복명운동에 앞장 선 그를 공공연하게 섬길 수는 없었기에 ‘카이산왕묘(開山王墓)’라 바꾸어 부르게 된다. 그러다 청 동치제(同治帝) 시절 대만을 방문한 흠차대신(欽差大臣) 심보정(沈葆楨)은 정성공을 재평가하여 ‘정성공은 명 왕조에 충성을 다한 유신일 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아니다.’ 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정성공의 작위인 ‘연평군왕’의 이름을 따 연평군왕사로 바꾸어 부르게 하여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카이산신사(開山神社)라는 일본 신사로 바뀌었고, 광복 후 원래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양식은 처음 세워질 당시 중남부 푸저우(福州)식이었으나, 훗날 개건 과정에서 중국 북방식 건축양식으로 바뀌었다. 연평군왕사 안에는 중국 문관 차림을 한 정성공 좌상이, 밖에는 무관 모습을 한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타이난공묘는 대만 섬 최초의 유교 교육기관이다. 정성공의 장남 정경은 1644년 동녕왕국(東寧王國) 국왕으로 즉위, 공식적으로 정씨왕조시대를 열었다. 정경은 재상 진영화(陳永華)을 중용, 국사를 분담하였는데 ‘명의 부흥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의 건의를 받아 들여 대만 최초의 공자 사당 겸 교육기관인 공묘를 세웠다. ‘대만 최고의 학문’이라는 뜻을 담은 ‘전대수학(全臺首學)’이라 씌여진 편액이 걸린 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교육기관인 명륜당(明倫堂)이 오른쪽에는 사당인 대성전(大成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좌학우묘(左學右廟)라는 유교사원 전통 건축양식에 충실한 것이다. 

  이처럼 대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 타이난은 ‘대만 400년사’의 첫장과 두 번째 장을 쓴 네덜란드인들과 정성공이 남긴 흔적들이 남아, ‘시간여행자’들을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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