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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Sep 25. 2017

황야의 이리,
그 내면의 여행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인생은 얼마간의 성취와 얼마간의 실패를 맛보는 거라고 했던가. 그 삶 속에서 나는 수없이 좌절하면서 한편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진다. 그 희망의 동인은 삶과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에 대한 버릴 수 없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셀 수 없이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을 만나게 된다. 자애로운 아빠, 음흉한 남자, 비열한 세납자, 허세가 넘처나는 쇼퍼, 권력 앞에 무력한 소시민 등 나 자신도 모르는 인격의 소유자가 바로 우리이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격의 두 가지는 바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성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함, 무난함과 같은 일반성이다. 개성이 두드러지는 날에는 이 무료하고 따분한 세상살이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일반성이 강해지는 때에는 세상의 이불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 특이한 하리의 특이하지 않은 인격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의 하리 할러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개성은 이리성(늑대성)으로 정의된다. 그의 삶은 고요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거칠고 고독하다. 그가 고독한 것은 세상과 섞여 살아갈 수 없는 그의 개성 때문이다. 그 개성은 자연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에 가깝다. 범용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시민사회에서의 그럭저럭 평범한 일상을 견딜 수 없는 외톨이, 방랑자 그리고 국외자이다.

그 이리성이 잦아드는 날에는 사회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눈을 뜬다. 사회에 적응하여 범용한 인간들처럼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려고 시도를 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그럴 때마다 하리의 내면에서 이리가 눈을 뜨며 하리를 비웃기 때문이다.

이런 하리의 존재는 특이한 듯 보이지만 이런 인격은 비단 천재, 예술가 그리고 하리만의 특성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자신의 개성을 현실화시켜 이상을 실현해 보고 싶은 욕망과 그저 이 사회의 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공존하며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자아들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 하리와 내가 세상을 견디는 법 - 유머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는 건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교차할 때뿐입니다. p.36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교차하며 둘 이상의 것들이 혼재하는 시대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역경과 고난의 시대에 범용한 인간보다 개성이 불멸한 인간이 더욱더 환영을 받는 법이다. 그 불세출의 인간들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 흔히 말하는 예술가, 천재, 지성인 등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상이 혼재하는 시대에는 예술가, 천재뿐만 아니라 범용한 인간 역시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범용한 인간 역시 내면에는 이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힘든 시간, 고통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유연한 농담, 풍자가 넘치는 유머이다.

똥고집이 줄줄 흐르는 상사의 꼬장꼬장한 꼰대질에 맞설 수 있는 건 강직함이나 진실함이 아닐 수 있다. 때론 그것은 부러지고 나를 상처 줄 수 있다. 오히려 유연한 농담이 그 위기를 모면하거나 극복하는 최적의 방법이 된다. 세상 살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사는 게 힘들고 무겁다고 그에 걸맞게 진지해지기보다는 가벼워지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유머만이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들과 통합시킬 수 있다. 세상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사는 것,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것, 소유하지 않는 듯이 소유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듯이 포기하는 것 - 자주 인용되고 즐겨 요구되는 이 모든 고귀한 삶의 지혜들을 실현시켜 주는 건 오직 유머뿐이다. p.79


*내면으로 향하는 몽환적인 이야기

유머로 견딜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구와 능력을 되돌아보며 살지 않으면 세상의 바다에서 그 방향을 잃어버리기 쉽다. 스피노자는 지혜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닌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했다. 삶 속에서 살아있는 나에  대한 성찰은 배의 조타와 비행기의 방향타와 같다.(내가 의미하는 성찰은 옳고 그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반추하는 것은 명상, 침잠과 같은 내면으로의 이동이다. 자신을 파고 들어가는 그 과정은 감히 언어로 설명되지 않으며 몽환적이며 환상적인 여행이다.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지혜와 진리는 말로써 전달될 수 없으며 혹 현인이 말로 전달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향한 성찰의 과정을 글로써 풀어가기 위한 방법 역시 몽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세계는 성찰자만의 가상의 세계일 것이다.

<황야의 이리>에서 하리는 나이가 쉰쯤 된다. 이리성(개성, 짐승)과 시민성(인간, 범인) 사이에서 유머로 세상을 견디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격이 둘 이외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설 마지막은 이야기의 환상성과 몽환성이 극를 달리는데 그것은 하리가 그전에 발견하지 못한 내면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그막에 여자를 탐하고, 춤을 추고, 그룹으로 섹스를 하고, 마약을 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닌 그의 내면의 세계이다.

이 세상을 견디는 방법은 자신의 다면적인 인격, 분열된 자아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유머이다. 삶을 가볍게 바라보고 나의 인격을 인정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위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p. 308

그리고 왠지 지나간 모든 일들은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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