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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띠프렌 Aug 16. 2021

하트 시그널

1화 - 1983 꽃과어린 왕자


찌르찌르 찌-르르르르---



개선장군처럼 여름의 시작을 진두지휘하는 매미들의 합창이 사방에 울려 퍼질 즈음. 교회 대학부 친선 축구 경기가 시작됐다.     


그날 아침. 혜민은 청바지에 노-란 반팔 니트를 입고 펌으로 곱슬곱슬한 머리를 롤로 감아 이마를 살짝 가려 앞가르마로 나누고 양쪽에 하늘색 장미가 장식된 머리핀을 꽂았다. 혜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흡사 만화 주인공 '캔디 '같다고 생각했다.     


혜민은 모임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잠시 내릴까 말까 고민했다.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그들과의 만남이 선뜻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워밍업 중인 몇몇 교우들이 보이고 혜민은 손을 흔들어 도착함을 알렸다. 곧바로 경기가 시작되고 혜민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불행히도 부상당한 교우가 있어 서둘러 경기를 마쳤다. 혜민은 달갑지 않은 행사가 빨리 끝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다친 교우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할 때 솔직히 혜민은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몰랐다. 혜민이 그 교회를 다닌 지 한 달도 채 안 되고 대학부 교우들과 인사 나눈 정도가 다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성빈은 그날 혜민이 입었던 노란색 니트와 하늘색 꽃핀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함께했던 두 사람의 기억의 파편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대학부 MT 참여 여부를 묻는 준수(대학부 회장)에게 혜민은 당일이면 가능하다고 했고 회의 결과 장소를 마석으로 정했다. 토요일 아침. 참가인원 모두 준비된 승합차를 타고 마석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준수는 친목 도모를 위해 게임을 시작했고 덕분에 혜민은 서먹서먹하던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이고 있음을 느꼈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려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걸어가고 있는데 다리를 다친 성빈이 혜민 시야에 들어왔다. 불편한 자세로 기타를 메고 있는 그가 안쓰러워 혜민이 먼저 말을 건넸다.


" 기타 들어줄까요? ”


신입 회원 혜민은 낯선 남학생과 눈 맞춤이 어색했지만 투박한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맑은 눈동자에 그만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와 보폭을 맞추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빈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고 혜민은 그의 취향이 자신과 비슷한 점이 신기해서 관심이 갔다. 게다가 비록 말수는 적어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하고 상대방을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 어디 갔나 했네! 뭐 재밌는 이야기라도? “   

  

갑자기 훅! 비집고 들어온 경호의 방해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지만,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혜민은 누군가의 시선을 계속해서 의식했다.   



그날 저녁.

혜민은 절친 수진에게 성빈을 만난 일과 첫인상을 이야기하며 자신도 모르게 업된 톤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뭇 놀랐다. 오히려 친구 수진은 혜민을 들뜨게 만든 상대가 누군지 호기심이 발동해서 무척 궁금해했다.     


MT를 다녀온 후 한 달에 한 번. 성빈은 LP를 사서 일일이 테이프에 녹음한 후 메모지에 적어 혜민에게 선물했다. 조심스럽고 깔끔한 혜민의 성격을 파악한 성빈은 그녀가 부담스럽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주위를 맴돌았다.


그즈음.

S대 준수와 K대 경호는 혜민에게 학보를 보내오고 간간이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어느 날 준수가 학보에 한 통의 편지를 동봉했다. 편지 내용은 '분노의 포도’를 읽고 서로 대화하자는 제안이었다. 혜민만 보면 장난을 치는 준수가 못마땅했던 그녀는 시큰둥하게 반응했고 그럴수록 그의 태도는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해 겨울     



첫눈 치고는 제법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정적을 깨우듯 시끄럽게 전화벨울리고 무심코 들은 수화기 너머로 대학부 경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혜민?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나와 줄 수 있니? "   

  

"  집 앞?! "          


혜민은 뜻밖의 전화에 코트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미 해는 져서 깜깜한 어둠 속. 골목 어귀쯤 희미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길 건너편에 뻐쩡다리 마냥 서 있는 전봇대가 보였다. 비스듬히 매달린 백열등이 스포트라이트로 한 곳을 비추고 그 불빛에 눈꽃가루가 어지러이 휘날리고 있었다. 혜민이 가까이 다가가자 어스름한 그림자 하나가 전봇대와 키를 맞추듯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 누구지? ’       

   

그림자 주인의 머리카락엔 불빛에 눈이 녹아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똑똑 떨어질 듯 흥건히 젖어 있는 그를 보고 혜민은 전화를 건 경호가 아닌 성빈이라 당황했지만 예기치 않은 그의 방문에 반가운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 추운데 어쩐 일이야? "    

 

" 응. 이거, 곧 크리스마스잖아. "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파리한 손으로 전하는 카세트테이프. 한 곡 한 곡 정성스럽게 녹음한 음악이 성빈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음악이 주는 메시지는 포장된 분위기로 더욱 멋지게 연출되어 감동을 주었고 이후로 꾸준히 건네준 서른여섯 개 테이프와 편지는 함께 하는 시간 속 추억과 어우러 혜민의 보물상자에 차곡차곡 쌓였다.


‘ 글쎄... 인연의 시작인가 ’   


그때 성빈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가벼운 떨림은 스무 해 기다려왔던 첫사랑의 설렘으로 다가왔다. 성빈은 어린 왕자였고 혜민은 그의 꽃이 되었다.


초저녁부터 흩뿌리던 눈발이 어느새 눈송이로 변해 사선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등 불빛을 따라 요란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 머리 위로 하얀 눈꽃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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