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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Jul 04. 2018

핸드폰을 끄고 들어가야 하는 식당

토트네스의 특별한 채식 레스토랑, <윌로우 Willow>


채식의 맛



'채식'은 오랜 숙제였다. 광우병 사태가 일었을 때에도, 매해 돌아오는 명절 마냥 찾아오는 구제역이니 조류독감이니 하는 난리를 겪으면서도, 영화 <옥자>를 보고 난 후에도, 나는 '채식'을 결심했다. 아예 끊지 못할 거라면 조금 줄이기라도 하자며 ‘간헐적 채식’을 다짐했지만, 결심한 지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아 고기를 찾았다. 고기 없는 식사를 몇 끼만 해도 치킨이며 삼겹살이며 고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고기를 끊기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채식이 구미를 당기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애물이었다. 마치 '채식'이라는 단어에 '맛없다'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채식’이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환경에 대한 의무감이 마음 한편에 있었지만 '맛'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토트네스의 비건 레스토랑 <윌로우 Willow>를 처음 봤을 때에 호기심이 일면서도 문을 열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숙소 호스트, 진Jean도 윌로우를 적극 추천하기에 애당초 염두에 둔 레스토랑 중 하나였지만 윌로우에 들어서기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오늘은 꼭 들러야지 하고 나서도, 끼니때가 되면 아무래도 고기가 먹고 싶었다. 토트네스에서의 첫날부터 며칠 동안 윌로우 문 앞까지 갔다가 발걸음을 돌린 것이 몇 번인지! 고작 한 끼 정도인데 뭐 대단한 도전인 것 마냥 호들갑이었다. 그래도 나름으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결국 진Jean의 집을 떠나 토트네스의 두 번째 숙소로 향하는 날, 그러니까 토트네스에 도착한 지 어언 사흘이나 지난날 윌로우를 찾았다.




아 이토록 맛있는

채식이라니



큰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식당의 풍경이 좋았다. 창가 명당은 이미 만석. 프런트 가까이 구석에 자리를 잡아 각자 취향대로 식사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낯선 단어가 많아 대충 '감'으로 주문을 마쳤다. 나는 가지가 들어간 라자냐, 영원은 키슈(Quiche)를 먹었다. 점심은 조금 저렴하게 제공하는 대신, 그릇을 들고 배식대를 쭉 돌며 직접 음식을 받아와야 한단다. 일렬로 늘어진 줄 뒤에 서서 메뉴를 이야기하니 미리 조리해둔 라자냐와 샐러드가 접시 가득 올려졌다. 붉고 푸른 야채의 색감이 한가득 올려지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쾌해졌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야말로 '건강한 한 끼'. 채식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은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식욕이 가득해졌다.


인생 라자냐를 만나다!


넓은 면을 별로 내켜하지 않아서 음식을 주문할 땐 늘 순위에서 제외하던 라자냐였다. 느끼하고 텁텁하다는 게 라자냐에 대한 나의 인상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건강하고 산뜻한 토마토소스 하며, 부드럽고 풍성한 맛의 라자냐. 고기가 없는데도 이 맛이 날 수 있단 말이야? 라자냐에 가득 들어있는 가지며 버터넛 스쿼시며 각종 채소가 제 몫을 하며 내 생애 최고의 라자냐를 완성했다. 영원의 키슈도 맛이 좋기는 매한가지. 이름이 낯설어 주문을 망설였지만, 각종 야채를 넣고 파이같이 구워낸 모양새에 반했다. 서로 질세라 접시를 비워내고 바닥까지 싹싹 긁었다. 너무 빨리 접시를 비워낸 게 괜히 머쓱해, 양이 좀 적은 것 같다며 웃었다.   




가게를 한다면

윌로우처럼



윌로우의 특별한 점은 음식에서 그치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순간순간마다 만나는 '윌로우'의 룰이 '윌로우'를 윌로우답게 만들고 있었다. 들어가는 현관에서부터 윌로우의 룰을 마주했다. 문 앞에 

붙어있는 [Mobile Free Zone]이라는 낯선 문구. 응? 식사 내내 핸드폰을 쓸 수 없다고? 365일 24시간 핸드폰을 붙잡고 살아가는 나에게 식사시간 동안 핸드폰을 멈추라는 것은 낯선 제안이었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랬다고, 핸드폰을 끄고선 가방에 슬쩍 찔러 넣었다. 음식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음식이 나오면 응당 핸드폰으로 사진 대여섯 장 찍는 것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지 못하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것도 주변에 실례가 될까 봐 조심하며 겨우 몇 장을 남겼다. 


This is A Mobile Phone Free Zone!


식사하며 핸드폰을 보지 않게 되니 대화는 훨씬 풍성해진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잠깐 여유 새에 한국의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내거나, 밥 먹고 뭐할지 검색을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구글 드라이브를 열어 돈 정리라도 하려고 했을 텐데 이건 뭐 이도 저도 할 수가 없는 상황.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주 앉은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이 식탁에 집중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공간과 시간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계산을 하려고 하니 현금 계산만 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또 눈을 끌었다. 은행에 수수료를 지불하기 위해 음식의 가격을 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란다. 짧게나마 가게를 해보니, 윌로우가 현금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사를 하면서 카드 수수료만큼 아까운 게 있을까. 얼마 남지 않는 마진에서 카드 수수료까지 깎이는 게 어찌나 아깝던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댔다고, 소비자도, 판매자도 아닌 카드사가 매번 얼마씩 쏙쏙 빼가는 것이 그렇게도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카드사 주머니로 들어가는 고놈의 수수료 탓에 고객이나 사업자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만큼의 비용을 더 부담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윌로우는 '그렇다면 카드를 꼭 써야 해?'라고 되물으며 그 틀을 벗어난 것 같았다. 고객의 편의와 더 많은 수익에 초점을 맞춘다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다. '불편에 죄송하지만, 주변 ATM기가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멘트는 정중하면서 단호했다. 매출에 비굴하지 않은 그들의 신념이 자못 부러웠다.


 


메시지가 있는

식당



나는 이토록 메시지가 뚜렷한 식당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원칙들이 윌로우를 특별하게 했다. 메뉴판에는 재료의 53%가 유기농이라고 굳이 적어 놓았다. 몇 퍼센트냐까지 따지는 유기농은 처음 본 것 같기도 하고, 1%라도 속이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이기도 해서 괜히 웃음이 났다. 



메뉴판을 자세히 보면 구매 제품의 53%가 유기농 제품이라는 안내가 보인다.


식당이라고 하면 흔히 그려지는 풍경이 있다. 습관화된 외식에 이미 익숙해진 장면들. 예를 들면 음식을 기다리기까지 핸드폰을 만지작 댄다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나올 때는 꼭 카드로 계산한다거나. 윌로우에는 이런 익숙한 장면이 없었다. 익숙함이 제거된 공간. 때문에 윌로우는 상당히 불편한 곳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번뜩 들게 하는 불편함을 그 누가 마다할까. 윌로우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신기한 것은 윌로우에 있었던 그 누구도 우리를 안내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 그저 공간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식당 그 자체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그 비법을 배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트렌드를 쫓는 곳이 아니라 신념을 생산하는 곳. 자신들이 ‘옳다’ 생각한 식탁을 차리는 곳. 식탁에 올려진 다른 생명의 무게는 덜어내고, 밥상을 함께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식탁이 있는 곳. 윌로우의 룰을 따르는 식사 시간은 마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 같았다.


며칠 후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찾은 윌로우. 저녁 시간에 맞춰 이벤트가 열리기도 한다. 우리가 간 날은 라이브 공연이 있던 날.



저녁 식사도 물론 훌륭했다!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 @our_unusual_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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