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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Nov 01. 2023

우리가 왜 여기서 만나요

13. 제주도 밤하늘 아래서


회사에서의 인사말은 참 한결같다.

금요일에는 "불금인데 어디 놀러 안 가요?"

월요일에는 "주말에 뭐 했어요?"

비 오는 날은 "이따 비 온다던데 우산 가져왔어요?"

그리고 7월부터는 "여름에 어디 안 가요?"

후덥지근한 더위가 시작되니 회사 동료들이 하나 둘 여름휴가 계획을 서로 묻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에 뭘 했더라 생각해 보니, 아! 작년 여름에 난 이혼하러 법원에 두 번 다녀왔었다. 여름휴가 계획 따위 세웠을 리 없는 시기였구나 싶어서 괜히 웃음이 났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1년 넘게 여행을 안 갔구나.’


남편도 없고 고양이도 없고 시부모님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자유롭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여행 다닐 수 있는 시기인데, 왜 안 가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이상했다. 이대로 계속 ‘나중에, 나중에’ 하다 보면 영영 안 가게 될 것 같아서 정말 오랜만에 항공권을 검색해봤다. 여러 여행지를 살펴보다 문득 제주도가 생각났다. 운전면허가 없긴 하지만, 차없이 다녀오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들었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몇 분만에 제주도에 아무 계획 없이 가보기로 결심했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여행답게 2주 뒤 항공권을 끊어놓고, “좋아! 이번 여행은 아무 일정 짜지 말고 푹 쉬다가 와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 J는 무계획도 계획을 세운다고 했던가. 나 역시 계획은 없다고 하면서도, 어느 지역에서 몇 박을 할지, 캐리어는 어느 정도 사이즈로 가져갈지, 최소한의 계획은 세우며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여행을 3일 남겨놓은 평일 저녁, 퇴근 후 캐리어를 싸던 중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K였다.

제주도 판포포구 스노클링 유튜브 영상을 보내주었는데, 내가 이게 뭐냐며 답장을 보냈더니 카톡이 한 번 더 왔다.


'통화 돼요?'


두근.

이게 뭐라고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K와 늘 메신저로 대화했고 통화는 처음이었다. 아니, 더 생각해 보면 전남편과의 통화 이후 사적으로 남자 사람과 통화하는 게 처음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긴장됐지만 왜 통화하자고 하는 건지 궁금해서 얼른 이어폰을 끼고 전화를 받았다.


"뭐 하고 계십니까?"


전화기 너머 K의 목소리는 아주 나른하고 지쳐 보였다. 지쳐 보였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목소리 만으로도 소파에 누워 힘 없이 멍 때리는 모습이 그려져서 그렇게 느꼈다.


"전 제주도 여행 갈 때 가져갈 거 캐리어에 대충 넣어놓고 있었어요. K님은요?"

  

"전 퇴근하고 집 와서 소파에 누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죠."


"크크. 목소리가 딱 그래 보이네요. 좀 전에 보내준 영상은 뭐예요? 제주도 가서 해보라고 추천해 주는 거예요?"


"저도 이번에 제주도 가면 스노클링 해보고 싶어서 영상 보고 있었거든요."


K와는 우연히도 같은 기간에 제주도를 가게 되었다는 걸 지난 모임 때 알게 되었다. 서로 신기해하긴 했지만 그 후 뭘 더 묻지 않았고 그러려니 했었다.


"J님 혹시 괜찮으면 같이 스노클링 할래요? 저는 같이 여행 가는 친구가 바다 들어가는 걸 안 좋아하거든요."


"저야 뭐 스노클링도 좋아하고, 별 계획 없으니 괜찮은데, K님이랑 일정이 안 맞지 않아요?"


"J님 첫날 언제 어디에 묵는다고 했죠?"


"김녕해수욕장 근처에 A게스트하우스요. 토요일에 거기서 묵어요."


"잠깐만요. 방 있나 볼게요. 아, 있네요. 내가 이거 예약하고 비행기표 바꿀 테니까 토요일 아침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요."


"허허, 그래요. 비행기 도착 시간 정해지면 톡으로 알려줘요."


불과 15분 정도의 짧은 통화. 그 사이 갑자기 내 여행에 K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하나만으로도 여행으로 설레던 마음이 더 설레기 시작했다.




제주도 휴가 일정은 금방 찾아왔다. 금요일 퇴근 후 바로 공항에 갈 예정이었고, 오랜만의 국내선 비행기라서 언제 공항에 가있어야 하나 헷갈렸다. 팀에 양해를 구하고 20분 정도 일찍 퇴근한 뒤 공항에 좀 더 일찍 도착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나 싶을 만큼 김포공항 수속과정은 빨랐고, 여유롭게 비행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약간 습하지만 선선한 밤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바로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잠을 잔 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제주 여행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지금 내가 제주도에 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뭐라 말하기 힘든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고 제주도에 큰 감흥이 없었는데, 왜 이 순간이 이렇게 행복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토요일 아침, 평소처럼 알람 없이 7시쯤 눈이 떠졌다. 커튼 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게 느껴져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는 김녕 해안가와 가까운 조용한 마을 어귀에 있었다. 오래된 단층 주택을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한 곳이었는데, 본관에서 숙박을 하고,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나와 별관으로 이동해 식사를 하는 구조였다. 계속 밖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해서 좀 불편하긴 했지만, 그걸 상쇄할 만한 장점이 있었다. 마당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양이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제주도의 아침 공기를 맞으며 아기 고양이들이 풀밭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 순간, 지금 완전하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공항에서 느꼈던 감동이 뭔지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이혼 후에도 내가 정말 잘 살고 있구나 하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모든 걸 결정하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저 지금 공항에서 출발해요. 40분 걸린대요.’


K로부터 카톡이 오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서 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얼른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이따 K와 함께 스노클링을 하기 위한 수영복과 수건을 챙겼다.


40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K가 게스트하우스 앞에 차를 세웠다. 바로 식당으로 이동해서 밥을 먹을 예정이었기에 K의 차에 올라타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는데 둘 다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크크. 아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서울에서 보던 사람들이 왜 여기서 만나요?”


“그러니까요. 이게 왜 이렇게 웃기지?”


K의 렌터카를 타고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함께 스노클링을 했다. 두 시간 정도 바다에서 놀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서 각자의 방에서 낮잠을 잤다. 저녁시간쯤 일어나서 아까 포장해 온 회를 위스키 안주 삼아 먹으며 K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밸런타인 12년을 슈퍼에서 3만 원 정도의 가격대로 사서 마셨는데, 이 가격에 이 정도면 훌륭하다며 둘이 반 병을 비울 정도로 꽤 술을 마셨다. K와 가까워진 이유 중 하나가 위스키였는데, 덕분에 이렇게 제주도 여행 친구가 생기다니 술이 취미가 된 이후 덤으로 얻은 장점이란 생각도 들었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바람도 쐴 겸 아이스크림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기로 했다. 밤 길이 어두울까 봐 랜턴을 챙겨 왔다면서 방에 들어갔다 나온 K의 손에는 일반 손전등이 아니라, 캠핑장에서 쓰는 예쁜 랜턴이 들려있었다. 제주도에 그런 것까지 챙겨 왔냐고 물으니 원래 준비성이 좋은 편이라 안 쓸 것 같아도 이것저것 챙기는 편이라고 했다. 김녕의 골목길은 혼자 걷기엔 무서웠을 것 같았다. 서울과 달리 가로등도 거의 없고, 인적은 더더욱 없고, 새카만 밤하늘만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함께 걷는 K 덕분에 그 길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이게 바로 여행의 낭만이지 하며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K님 덕분에 이 시간에 돌아다녀 보네요. 혼자였으면 무서워서 이 시간엔 절대 숙소 밖으로 안 나왔을 텐데.”


“저도 J님 덕분에 스노클링도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양이랑 놀고. 근래 이렇게 재밌었던 적이 별로 없었는데, 즐겁네요.”


함께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제주도의 밤.

서로가 서로의 친구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우린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기뻤다.


이 사진을 보여줬더니 자신의 거북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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