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뜻밖의 동행, 뜻밖의 연애관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는 뻔한 말이 왜 지금까지도 유효한 지 알 것 같았다.
K는 원래 계획대로 이틀째부터는 같이 여행하려던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었다. 나 역시 다음 2박은 다른 숙소에 묵을 계획이어서 제주공항 근처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더니 K가 자기도 가는 방향이니 태워다 주겠다며 어느 호텔이냐고 내게 물었다.
“제가 어디더라. 호텔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아, G호텔이요.”
“응? G호텔?”
“네, K님은 친구랑 어느 호텔 잡았는데요?”
“…G호텔이요.”
“네?”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2초 간 정적이 흐르더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또 무슨 일이에요? 이 정도면 K님 저 스토킹 하시는 거 아니에요?”
“에이,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먼저 제주도 여행 계획 세우고 먼저 호텔 예약 했다고요.”
“그렇긴 하지만요. 우리 이 정도면 운명 아니에요? 둘 다 비혼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로맨스소설 하나 금방 나올 것 같은 상황인데?"
“그러게요. 오히려 재밌네요. 우리가 서로 연애 생각 없는 사람들이라서 이런 일이 생겨도 뭐가 없잖아요.”
그런가. 우리가 오히려 아무 흑심이 없어서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나중에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여행어플에서 제주도 호텔을 검색해 보니, 호텔만 800개 이상이 검색되었다. 같은 체크인 날짜에 800분의 1 확률을 뚫고 같은 숙소를 예약할 확률. 심지어 둘이 서로가 제주도에 간다는 걸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이런 우연을 계산할 수 있을까.
행선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 편히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늦은 아침을 먹으러 출발했다. 함덕에 들러서 유명한 딱새우김밥과 해장라면을 먹고, 해변을 산책한 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 안이 조용해서 정적을 깰 겸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연애 얘기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각났다.
“K님, 저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네, 물어봐요.”
“좀 조심스럽긴 한데, 주변에 비슷한 경우가 없기도 하고 쉽게 물어볼 주제도 아니라서 혼자 고민하던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K님은 왠지 상황이랄까 그런 게 비슷한 부분도 있고, 저보다 비혼주의자로서의 인생을 더 오래 살아온 분이라서 궁금해서 그런데요.”
묻기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나답지 않게 본론을 말하기 전에 뱅뱅 돌려서 구구절절 설명 먼저 했다. K는 운전하면서 계속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편하게 물어봐도 돼요.”
“응, 혹시 K님은 연애를 안 하면 섹스는 어떻게 해요?”
“음?”
K의 눈이 커지면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 답지 않게 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이혼한 지는 이제 1년이 되어가고, 사실 그가 바람피웠다는 걸 안 이후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서로 섹스는 안 했거든요. 이혼 후 저는 연애도 안 했고, 남자도 당연히 만나지 않았고 그랬는데. 뭐랄까. 엄청 섹스가 하고 싶어! 이런 건 당연히 아닌데, 지금부터 앞으로 평생 안 하고 살 거냐 하면 그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수년간 그렇게 사신 것도 놀라운데요.”
“그래요? 결혼한 부부 중에 섹스리스 부부 많은데. 아무튼, 그래서 그나마 젊은? 건강한? 말이 점점 이상해지긴 하는데,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하면서 살고 싶은 거죠. 그런데 또 연애나 결혼은 당장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원나잇 같은 건 생전 해본 적도 없고 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그런 궁금증이 생기는 중인데, K님은 어떻게 해결? 해소? 말이 점점 이상해지는군요. 크크.”
K도 함께 웃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전 J 님하고는 마인드랄까, 남녀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서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전 여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을 뿐, 사실 여자는 좋아해요.”
“아, 알죠. 그 얘긴 워낙 자주 하셔서. 특히 예쁘고 얼굴 동그랗고 키 큰 여자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제가 정말 자주 얘기하긴 했군요. 그렇게 줄줄이 외우듯이 나올 정도라니.”
모임 때 사람들 간에 각자의 이상형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K가 일관되게 했던 말이라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여자랑 만나는 건 좋아해서, 전 그런 제 가치관을 이해해 주는 여자분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섹스도 해요.”
“응? 섹스파트너 같은 거예요?”
“아뇨, 제 기준에선 그거랑은 달라요. 해외에선 FWB(Friend with Benefit)으로 표현하던데, 섹스를 하고 싶어서 만나는 관계라기보단 친구로서 좋은 분들인 게 우선이에요. 친구로서 잘 맞고 같이 있을 때 대화 나누는 게 좋고 그런 친구분들이랑 서로 상황이나 마음이 맞으면 섹스도 하는 거죠.”
“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 정도 감정이면 사귀는 거 아니에요?”
“음, 이 얘기도 제가 몇 번 하긴 했는데 연애하고 싶은 마음의 첫 단계는 독점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를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연애를 하는 건데, 저의 경우는 저랑 섹스를 하는 그 친구들이 다른 남자친구가 생겨서 그만 만나게 돼도 전혀 상관없고, 저랑 오늘 섹스를 하고 내일 다른 남자랑 섹스를 해도 상관없거든요. 어떤 여자를 만나든 그랬어요.”
“아아, 만약 정말 그런 마음이라면 안 사귀는 게 맞을 것 같긴 하네요. FWB라니, 전 처음 알았어요, 그런 관계.”
“그래요? 그게 오히려 더 신기하네요. J님이랑 저랑 확실히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 같아요.”
K의 연애관은 몇 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까지 대화를 확장시키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연애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인생 경험을 많이 쌓아서인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서인지 그의 이야기가 아주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해서 그 삶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까.
K와 서로의 연애관, 아니 그보단 관계에 대한 가치관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G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덕분에 즐겁게 편하게 왔어요. 고마워요.”
“저야말로 J님 덕분에 재밌게 왔네요. 남은 이틀간 여행 즐겁게 하다가 가요.”
“응, K님도요! 즐거운 휴가 보내고 가세요.”
각자 체크인을 하고 인사한 뒤, 내 두 번째 숙소로 들어갔다. 아침까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와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호텔방. 창가로 가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방이었다.
캐리어를 한쪽에 놓아둔 뒤 창가 의자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K와 함께 오는 길에 나눈 대화가 참 낯설고도 신기했다고. 어릴 때의 나라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친해지긴 어렵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세상엔 다양한 가치관이 있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의 폭이 넓어진 나 자신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보수적인 삶만 살아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는데, 혼자 제주도에 와서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여행을 함께 하고, FWB에 대해 나름 진지한 대화까지 나누다니. 이런 낯선 나 자신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제주 여행 이후 내 안에 조금씩 누군가를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무렵 D를 만났다.
*이 브런치북의 완결편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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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와 일부 이어지는 조니워커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