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모든 분야에서 하루가 다르게 적용되던 때, 세상이 바뀌면 종이책은 사라질 거리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습니다. 종이책을 좋아하는 나는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는 법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아 있습니다. 전자책은 편리함이 있지만 일단 눈이 피곤해서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은 선호하기 어렵습니다.
경기 외곽에 살 때였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주기적으로 교보문고에 들르곤 했습니다. 다양한 책과 음악까지 나오는 서점은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 기회가 됩니다. 아이들 코너에서 마음껏 앉아 책을 읽고 가져다 놓기를 반복하며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고 하나의 놀이터 구실을 톡톡이 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매주 렌털 업체를 통해서 정해진 양의 책을 받아서 읽고 반납하던 중이었습니다. 둘이서 주 8권을 읽고 돌려주고 그렇게 몇 년간 반복했습니다. 처음엔 모든 책을 다 사줄 수 없는 부모의 얄팍한 꼼수로 시작하다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좋아 꽤 오래 사용하던 서비스였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어지간한 건 물려받아 쓰거나 렌털을 해서 사용했고, 특히 나이에 따라 관심이 금방 달라지는 장난감과 책은 렌털을 활용했습니다. 자기 것과 다른 사람의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후라면 이주 좋은 방법입니다. 일주일마다 바뀌는 장난감과 책들,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고 나이에 따른 프로그램도 참고해서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섞을 수도 있어서 아주 유용했습니다. 덕분에 기간이 지나서 보내줘야 하는 책과 장난감을 최대한 가지고 놀고 읽으려 애쓰는 걸 경험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보내줄 것도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는 꽤 괜찮은 경험입니다. 아이들이 내 것만 고집하지 않아도 좋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여러 방면의 책들을 접하면서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점에 가는 날엔 아이들도, ’내 책‘을 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부모는 조건을 붙입니다.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어 집에 두고 계속 보고 싶은 책을 각자 2권만 고를 수 있다는 것! 참 야박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의외로 집에 가져갈 책을 고르느라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몇 권씩 가져다 놓고 보고 또 보고, 고르고 또 고르고... 자기 것을 만드느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칭얼거리지도, 다른 데 한눈을 팔지도 않고 쌓아놓은 책을 읽느라 고개를 들지 않습니다. 부모들도 책을 읽으며 모처럼 휴식하면 그만입니다. 한참을 고르고 골라 집에 가져온 책은 또 마르고 닳도록(실제로 금방 너덜너덜해지는...) 읽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외울 만큼 읽었으면 싫증이 날 법도 한데 도란도란 서로 읽은 책 내용으로 놀이도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때 만들어진 습관이 아직도 종이책을 좋아하도록 만든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다가도 금방 시들해지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또 그만큼 아이들은 새로운 것, 새로운 환경에 자주 노출되는 만큼 호기심이 자주 꿈틀거립니다. 뭐든 놀이가 되면 집중도는 맥스가 되죠. 집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들이 한계를 보이면 그 반경을 넓혀 주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론 모험을 걸어볼 수도 있습니다. 서울은 꽤 넓은 도시이지만 촘촘히 나눠보면 또 그런대로 좁혀질 수 있는 거리들이 있습니다. 특히 시내 중심가로 나갔을 때는 아이들에게 모험(적당한 긴장감과 흥미가 발동하면)을 해볼 기회를 줍니다. 세상은 늘 위험한 곳이지만, 또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방법도 배울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 과정을 스스로 해 볼 때 나중의 더 큰 위험이나 불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1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혼자 버스를 타고 병원에서 만난다(주변에서 미친 엄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엄마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던가, 고학년이 되어서는 아이들끼리 집에 까지 걸어오게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아마도 아이들의 긴장은 당시 자신들 삶의 최고점이었겠지만 이후 다른 일이 닥쳐도 비교적 덤덤하게 잘 대처해 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집에 걸어오며 겪은 이야기들은 이후에도 무용담처럼 자주 등장하고 시간을 두고도 스스로 자랑스러워합니다. 자신들만의 추억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혼자 이룬 성취나 작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경험의 반복은 아이에게 큰 자신감을 줍니다. 아이들이 커가며 맞는 몇몇 변곡점마다 놓치지 않고 '단순히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은 부모 노릇 중 꽤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자책이 널리 사용화된 시대라도 가끔씩 종이책을 꼭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천천히 생각하며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는 맛(?)을 잊지 못합니다. 오감 중 특히 촉각과 후각으로 뇌를 깨우고, 머릿속이 각성되면서 깨어난 뇌의 활동이 기억으로 남는 과정이 참 좋습니다. 그 안에 추억되는 냄새와 이야기들이 - 힘든 순간, 결정의 순간 그리고 꼭 거쳐야만 했던 순간들을 곱씹고 되씹고 하느라 넘기지 못하던 책장의 꼬깃하고 후줄근하던 기억들이 - 가끔씩 환기시키는 퀴퀴한 겹겹의 시간을 좋아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결정하던 순간의 집중력과 선택의 중요성을 참고 배우던 아이들이 이젠 서로 추천하며 종이책을 돌려보는 과정에 있습니다. 또 자신들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한 장 한 장 보는 재미도 꽤나 쏠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