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참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울살이를 못 버리고 삽니다. 내 삶이 뭐 그리 대단한 인프라를 원하랴 싶지만 실제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불편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잠깐의 서울 밖의 생활이 그랬고 그건 아쉬움이 아니라 정확히 불편함이 더 컸습니다. 특히,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문화생활을 한다는 건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한량처럼 살지도 못하지만 가끔은 한량처럼 문화생활을 즐기길 바랍니다. 잠깐의 사치일지도 모르지만, 잠시 내면을 쉬어가는 순간이기도 하고 정리 정돈과 새로운 계획을 위한 '삶의 틈'이기도 합니다.
장거리를 단거리처럼 뛸 수도 없고 그렇게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장거리를 달리는 중에도 집중해서 단거리처럼 달려야 할 때가 반드시 몇 번은 옵니다. 중간중간 숨을 잘 쉬어야 하고 물리적으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육체의 피로감과 고통을 버텨내야 할 순간도 옵니다. 남들보다 느리게 가는 시간처럼 느껴질지라도 촘촘하게 그 과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때론 틈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질어질한 생계와 닳아서 녹아나는 기계처럼 부르튼 발걸음을 내딛는 매일을 살면서, 대체 어느 순간 틈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를 들어가기 전, 서울을 가면 꼭 들르던 곳이 교보문고와 대학로였습니다. 가끔씩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 문화생활일지 공중도덕일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서울 살이에서 양념처럼 하던 행위들을 잊지 못하던 엄마의 치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에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비록 컴컴한 극장에서 울음을 터트리느라(다행히 어린이 전용 극장이라 연극은 연극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왁자지껄했습니다.) 뭘 보느라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이 끝이 났지만 아이들은 좋아했습니다. 시끌벅적한 것보다, 사람들의 무리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는 조용한 공간과 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이들, 장난감보다 자신이 찾아낸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며 놀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랐습니다. 혹시... 내가 극.성.인가?
문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른도 아이들도 나름의 문화 속에 살고 문화생활을 하며 성장합니다. 어디 특정한 미술관이나 공연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사회적인 생활 모든 곳에서 마음과 몸으로 느끼고 겪는 것들입니다. 다음번 교보문고에 가기 전까지 스스로 선택해서 가져온 자신의 책을 너덜너덜해지도록 읽는 아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누군지는 알지 못해도 그저 소리가 좋아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들리는 음계로 흥얼거리는 아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형체도 불분명해 보이던 것에 자신만의 물감을 섞으며 고민고민하고 색을 입히던 아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키를 훌쩍 넘는 곳이라도 마치 날개를 달은 것처럼 홍당무가 된 얼굴로 끝의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가던 아이의 마음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수없이 많은 시간들이 모여 한 명의 아이를 만들고 성장시킵니다.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혼자 미술관을 찾고,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책장을 넘기며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삶에 숨을 쉴 시간을 줍니다.
사실 서울을 벗어난 삶이 사람이 살기엔 더 좋은 환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도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특히나 아이들은 마치 그랬던 것처럼 맘껏 뛰어놀고 쉽게 더럽혀지며 이리저리 뒹굽니다. 오솔길을 걸으며 소리 지를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합니다.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서울 생활보다 더 활달하고 몸을 움직이는데 제약이 덜합니다. 실시간으로 마주치는 벌레들도 몸서리치게 무섭진 않습니다. 알지 못하면서 떠는 호들갑은 최소한 배우지 않게 됩니다. 살아있는 생물은 위협을 가해서 사람이 먼저 해치지만 않으면 다 자연스레 제 갈 곳으로 간다는 것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아토피와 기관지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고, 숨을 잘 쉴 수 있습니다.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간절함일 수도 있고 살아가는 원동력일 수도 있습니다. 번잡함을 정리할 시간을 내고, 자신의 길을 점검하는 시간을 벌고, 좀 더 촘촘히 앞을 가늠해 보는 필요한 시간입니다. 산을 오르거나 길을 걷다가 바라보는 풍경은 내가 서 있는 위치나 그 높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볼 수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집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발걸음 어디가 잘못되어 들어선 길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눈앞을 가리는 큰 바위를 견뎌볼 것인지 그 바위의 실체를 바라볼 곳으로 더 오를 것인지 결정도 해야 합니다. 어릴 때 철없이 아버지에게 대들며 따지던 가정교육의 실체가 나의 숙제로 주어진 것을 체감하며... 난 참 아버지에게 어려운 자식이었었구나, 가끔 생각해 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