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옮길 직장에 회의하려고 잠시 들렸다. 다음 분기에 할 일을 정하는 회의였다. 길지 않은 회의를 보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떠올랐다. 이제와 할 일을 바꾸기엔 어려워 보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 파트의 담당자가 될 처지다 보니 어차피 그런 부담을 질거면 내가 선택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분기에는 다르겠지? 아니면 ... 이번에는 회사에 오래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들을 회의에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물어보면 말했을까? 모르겠다. 일단 글에 적을 수 있으니 비밀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회의가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갔다. W,J 그리고 나는 생고기와 스팸, 라면사리를 추가한 생고기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실은 요즘들어 이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비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머리가 길고 모자를 좋아하는 신입 개발자 W는 비밀이 없단다.
"저요? 저는 딱히 비밀 없는데"
"모든 사람한테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나는 물었다.
"글쎄 그래도 물어보면 다 말해줄 것 같은데..."
W는 말을 흐렸지만 사실이라면 부러웠다. W는 사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을 만큼 심지가 굳거나 아니면 우연히 모든 비밀이 사회가 용납하는 선 안 쪽이라는 소리다. 나에게는 둘 다 불가능할 일이다. J는 그래도 비밀이 좀 있는 듯하다. 그는 내 질문에 대해서 돌려서 긍정했다. 전에는 좀 더 솔직하고 편하게 말했었는데, 여기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 하고 말을 아끼는 주제가 하나 둘 생기다 이제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고 한다.
몇일 후 W의 이직소식을 들었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 언제까지 다닐거냐고 물어봤으면 사실을 말해줬을까?
난 둘 보다는 비밀이 많은 듯 하다. W처럼 물어볼 때만 말해줄 것들도 있고, J처럼 비밀까지는 아닌데 말을 조심하게 되는 주제들도 있다. 나는 비밀도 종류별로 있다. 그러나 내 비밀이 모든 사람에게 비밀은 아니다. 가끔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에게는 비밀인 것이 상대방에겐 비밀이 아닌, 반가운 경험들도 있었다. 그런 반가움의 빈도가 적어지고 비밀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때는 누군가에게 작은 비밀 한 두 개를 맥락도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누구인지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비밀이 비밀로 남는 것만이 중요하므로. 그렇게 나는 살면서 운이 좋게도 모든 비밀을 한 번 쯤은 다 꺼내보았다. 내가 비밀을 꺼내면 꽤 자주 상대방도 비밀을 꺼낸다. 비밀을 말해주길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들 나처럼 비밀을 꺼내놓고 싶은가 보다.
이제는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 어딘가에 나랑 비슷한 비밀의 방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이제는 비밀의방이 닫힌 채로 두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