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노트북
나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못했다. 안했다고 하는 편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3학년 이후로는 늘 반 꼴찌에서 5번째 정도의 성적을 꾸준히 유지했다. 오랜 꼴찌였지만 나와 반 꼴찌를 다투던 친구들과 다른 점이 한가지 있었는데 나는 국어나 사회등의 과목은 8-90점을 맞는 꼴찌였다는 점이다. 대신 과학과 수학등은 10-20점을 맞을 정도라 나의 평균을 확실히 낮춰주었다.
일반적으로 꼴찌라고 하는 아이들과 달리 나는 좀 나대는 성격이었다. 말썽을 피워 나댔다는게 아니다. 바닥을 치는 성적이었지만 나는 어릴때부터 동화 구연과 글 쓰는걸로 유명했다. 딴지 일보가 나오기 20년전 이미 당시의 신문을 짜집기해서 패러디 신문을 만들어 반 아이들이 돌려보았다. 수업시간에 읽던 친구가 한 선생님에게 빼앗겼는데 교무실 선생님들이 모두 읽었을 정도로 전교적이었다. 한편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를 패러디한 소설도 많이 썼다. 매주 아이들이 다음 편을 기다리며 재촉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공부는 안했지만 이런걸 집필하느라 밤을 세곤 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동화 구연 시험 같은 것도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동화를 술술 이야기하다가 시간 관계로 선생님이 끊으면 반 아이들이 아쉬워하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 찾아와 나머지를 마저 들려달라고 하고는 했다. 하교길이면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아이들 앞에서 나는 즉석에서 웃기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들려주었다. 전교적으로 나는 웃기는 아이로 유명했다. 아직도 어쩌다 그때 동창들을 만나면 다들 내가 코메디언이 될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만 해도, 학생이 그런걸로 선생님에게 사랑받지는 않았다.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을 칭찬해준다던지, 학업 외 다른 재능을 키워준다던지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오직 성적이었다. 안좋으면 매일 같이 맞았다. 그때는 쪽지 시험 같은거 틀린 숫자대로 맞고는 했는데 남들 한두대 맞을거 나는 20대씩 맞고 그랬다. 몇몇 선생님들은 정말 창의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때리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 못하는 놈은 맞는게 싼 시대였다. 학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성적이었고 그것이 학생의 존재 이유였으며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으니까.
더하여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도 한번 오시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촌지가 빈번했다. 어머니회 같은거 활동을 하면서 반에 이런저런 물건을 갖추어 주는 학부모들이 있었다. 반장 당선되면 빵 같은거 돌리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은 그런 사정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가, 유독 더 맞았다. 그런데 훗날 생각해보니, 꼴찌인 아이들은 다 집이 못살았다. 그것 참 이상한 우연이었다. 그때는 단지 내가 머리가 안좋아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은 다 공부를 잘했을까? 어리고 철없던 시절의 나는 그 두가지를 연관 시키지 못했다.
백일장을 가면 나에겐 글 쓰는게 가장 쉬워 재빠르게 시를 3편 쓰고 놀았다. 그렇게 대충 썼음에도 다들 내 시가 좋다고 반 대표로 뽑았지만 선생님이 공부 못하는 애의 시는 뽑을 수 없다고 해서 결국 뽑히지 못했다. 6학년때는 우주소년단이라는게 새로 생겼는데, 그게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더니 반 아이들 다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이건 공부 잘하는 애만 하는거라고. 그런 일들이 한국에서 학교 다닐때 참 많았다. 거의 30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고 다시금 깨닫는다. 한 사람의 평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부모라는 자리 빼고 또 있을까.
내가 미국으로 오고 나서의 학교생활은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의 학교 선생님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최대한 아주 좋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만큼 학생들을 가르침에 있어 직업이니까.. 하고 마지 못해 하는게 아닌, 선생님이라는 그 세 글자의 무게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