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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효진 Oct 04. 2022

교육소설 ep22.

솜 진 당나귀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 이름, 인물 등은 실제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소금 진 당나귀에 대한 동화가 있다.



 소금 장수의 소금을 진 당나귀는 어느 날 다리를 건너다가 실수로 넘어져 물에 빠진다. 소금이 물에 다 녹아 가벼워진 걸 깨달은 당나귀는 그 이후로 늘 그 다리를 건널 때면 일부러 물에 빠지곤 했다. 당나귀의 꾀를 알아챈 소금 장수는 어느 날 소금 대신에 솜을 잔뜩 담은 짐을 매준다. 이날따라 가볍게 생각했지만 이미 습관이 그렇게 들어버린 당나귀는 그날도 어김없이 물에 빠졌고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은 한층 무거워져 당나귀를 짓누른다.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뜬 연지의 몸은 물에 적신 솜만큼이나 무겁고 질척거린다. 내가 무거운 건지 공기가 나를 누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중압감에 몸을 일으키는 것이 쉽지 않다. 팔꿈치를 짚어 조금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몰려오는 두통에 다시 침대에 풀썩 몸을 다시  뉘고 만다.







물먹은 솜 진 당나귀. 


딱 그거 같네.







 딱히 꾀를 부리느라고 물에 빠진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쩌다 이런 벌을 받은 걸까.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30분 후면 아린이가 돌아올 시간이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엄마는 자식을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말마저 버거운 죄책감이 되어 조여온다.



 아린이, 세린이, 그리고 남편과 연지까지 핸드폰 잠금화면 속에서 웃고 있다. 연지는 바닷바람을 맞아 잔뜩 날리는 긴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나머지 한 손은 아린이의 손을 잡고 있다. 세린은 연지의 치맛자락은 붙잡고 남편 종범은 연지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그래 나한테도 가족이 있지. 


전부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 거지. 


이게 뭐라고.







아린과 세린의 얼굴을 보면 마냥 귀엽고 예쁘다.


하지만 안 봐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운 날도 있겠지만 또 그런 데로 하루가 살아질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오늘도 엄마표영어란 이름 하에 열심히 사는 엄마들의 피드가 넘쳐난다. 


영어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각 영역별 교육에, 아이들을 위한 요리에, 본인들 다이어트와 운동도 어찌나들 열심히 하는지.







참 다들 열심히 살아.







무엇을 위해 다들 이렇게 열심히 살까.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도 원동력도 모르겠다.


 


아이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진부한 이유를 떠올리면 숨이 조여온다.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냥 막살다가 죽을병 걸려서 


죽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결혼하자고 해서 이렇게 만들어?







 어젯밤, 연지의 손에 쥐여 있는 와인잔을 뺐어드는 남편 종범에게 늘 하던 거친 말을 내뱉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었던 종범은 뉴욕으로 유학 간 이후 가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연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다른 남자를 사귀는 것도 다 지켜봐 온 동네 친구였던 종범은 연지에게 결혼하자며 말을 꺼냈다. 연지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주변 대부분의 남자가 그랬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연지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







 다른 남자와 종범이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안정되어 보이는 면모였다. 커다란 감정 기복없이 늘 사랑받고 자라온 것 같은 모습. 



 몸이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첫눈에 끌렸던 남자들과만 주로 만나왔던 연지에게 연애는 첫 한두 달의 설렘과 불타오르는 감정이 지나고 나면 지난한 싸움의 시작이었고 그런 관계는 언제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떻게든 한 번 자보려는 시시껄렁한 남자들은 걸러내긴 했지만, 가끔 너무 외로운 날이면 알면서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런 연지에게 종범은 전혀 육체적으로 끌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선량한 미소가 주는 안정감은 연지가 가장 연지다울 수 있게 해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살면서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런 느낌을 주는 남자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종범에게도 10년의 결혼 생활은 지치게 하나보다.


요즘 들어 싸움이 잦아들었다.







그래, 당신이 겪은 아픔. 


그거 아무나 흔하게 겪는 거 아니지. 


그런데 이제 20년도 더 지났잖아.


이제 당신에게 가족은 당신 부모님이 아니라 나랑 아린이, 세린이 아니야?


언제까지 과거에 빠져서 살 거야? 


주변 탓 남 탓만 하면서 살면 


결국 제일 괴로운 건 당신 아니야?







 계속 반복되는 말다툼에 딱히 이렇다 할 출구는 없어 보였다.


 종범이 그럴수록 술 생각만 더 날 뿐이다.


더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서 종범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싶다. 그러면 그 땐 지금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미안해 하려나. 









 오빠와 그렇게 애틋한 남매지간도 아니었다.


어쩌면 입고 있던 정장 마이를 벗어 오빠의 시신 위에 덮어 가려주었던 H 원장님이 오빠를 더 아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오빠와 나는 자주 맞았다.


학습지가 자꾸 밀려서 숨겨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더 심해졌던 것 같다. 하기 싫은 밀린 학습지를 기존에 한 학습지가 쌓여 있던 더미 사이사이에 끼워 넣곤 했다.



 매는 주로 부러진 교자상 다리였는데 양 끝에 노란 박스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연지야, 우리 매 숨길까?







절대 어디다 숨겼는지 말하지 않기다?








 작당모의 끝에 오빠와 신신당부가 이어졌지만, 엄마가 오빠와 각 방에 분리해놓고 심문해대는 통에 연지는 매를 숨겼노라고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덕분에 오빠는 그날 베란다 호스에 끼워져있던 빨간 호스로 등짝을 맞아야 했다.







오빠, 미안해.







연지야, 


나 고대 이집트 노예의 심정을 


오늘 이해하게 됐잖아. 


교자상 다리는 딱딱하고, 일자라서 


닿는 면적이 작아서 덜 아픈 거였어. 


호스는 유연해가지고 


등에 쫙 달라붙는데 


지금까지 맞아본 거 중에 


제일 아프더라.







 미안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지였지만 말을 워낙 재밌게 하는 오빠 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이후로도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수단으로 맞았다.


집은 물론이고 길을 가다가도, 등교길이건, 아파트 단지에서건 부모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냈다. 



말을 싸가지 없게 했다며 머리를 빗고 있던 브러쉬로 오빠의 뺨을 후려치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숙제를 직접 하지 않고 도와달라고 했다고 혼날 때는 엄마가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머리를 때렸다. 



방구석을 기어 다니며 빌었지만, 부모님은 한 번 화가 나기 시작하면 반나절은 때리고 또 때렸다.



이제 끝났나 싶어서 방에서 숙제를 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으면 이내 분이 안 풀렸다는 듯 다시 들어와 했던 말을 다시 퍼부었다.



아빠를 닮아 날씬한 체질을 타고난 연지와 달리 엄마를 닮아 통통했던 오빠는 살 문제로도 자주 혼났다. 과자를 숨겨 놓고 먹는 걸 들켰을 때는 화가 난 아빠가 오빠를 걷어찼다. 앞으로 고꾸라진 오빠는 서랍장 모서리에 이마를 박았다.







나가서 줄넘기 10,000번 채우고 와!







 줄넘기를 던져주고 씩씩거리는 아빠 몰래 오빠를 따라나섰다. 동 뒤편 공터로 넘어가자 줄넘기를 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오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빠..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오빠의 이마에는 피가 한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몰래 챙겨나온 마데카솔을 발라봤지만 피와 범벅이 되어 빨간 슬라임처럼 되고 말았다.




 오빠는 둘이 있을 때면 맞았을 때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곤 했다.



 아빠에게 듣는 그룹수업에 숙제를 안 해가서 아빠가 아무 데나 막 때릴 테니까 스키복 입으라고 한 이야기.



 엄마에게 차 안에서 맞는데 운전석에 앉은 엄마가 뒷자석에서 수그리고 있는 자기를 때리느라 이마가 욱신하게 부풀어 오른 이야기.



아무리 풀어 놓아도 에피소드가 끊이질 않았다.







연지야, 근데 스키복이 


잠바랑 바지가 있잖아. 


근데 아빠가 내가 아직 잠바만 입었는데 


때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바지는 아직 못 입었는데요 


말도 못 하고 하체는 그대로 다 맞았잖아.


여기 멍든 거 아직도 다 안 빠졌어.







엄마가 그때 열받아서 씩씩거리는데 


차 안에 성에가 뿌옇게 껴가지고 


밖에 안보일 지경이었다니까.


정수리가 어찌나 욱신거리던지 


진짜 뻥 안치고 5센치는 넘게 


부풀어 올랐을걸.







혼난 이야기로만 몇 시간씩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 있던 오빠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땐가? 


그 때 왜 일기장 검사하잖아. 


그 때 엄마한테 혼났다고 썼거든? 


그랬더니 엄마한테 혼났다고 썼다고 


엄마한테 혼났다? 


아니 일기는 있는 사실 그대로 쓰라매. 


난 그래서 반성한다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썼는데도 혼났어. 







근데 난 무엇보다 충격적인게 


저번에 승호가 혼나는 걸 봤거든? 


뭐 어느 집이나 다들 혼나면서 사는구나 


했는데 다 혼나고 나서 승호 엄마가 


이리오라고 하더니 승호를 꼭 안아주는 거야.


 난 그런 거 처음 봤어. 


다른 집은 다 혼나고 나면 그렇게 안아주나?


 난 나중에 자식 낳으면 


혼낼 때 혼내더라도 끝나고나면 


그렇게 꼭 안아줘야겠다 싶었어.






오빠의 이야기는 몇 번이고 마음 속에서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오빠는 결혼하고 


애도 낳고 싶었었나보다.






오빠에게 묻고 싶은게 많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오빠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 부모님은 자기 자식이 


사람들 눈에 완벽한 아이로 보이는 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아직도 오빠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참 괴로웠을 그 아이가, 그 이야기를 또 재밌다는 듯 유머 섞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던 그 작은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나라도 안아줄걸 그랬나.







이미 죽은지 20년도 더 지난 오빠의 물 먹은 마음의 솜을 대신 짊어진 것처럼 다시 연지의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3학년 3반 


반대표 맡은 이현주입니다.


임원 엄마들 단톡이 필요해서 만들었어요.


곧 반 단톡도 만들겠습니다.


저희 브런치 한 번 해요.







카톡이 울려 폰을 집어 들었다.







현주..


학교 다닐 땐 조용하더니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참 잘 어울리네. 


그래 반대표는 이런 엄마들이 해야지.







임원 단톡에 있는 게 누군지 확인하자 해맑게 웃고 있는 남매 사진이 보였다.


아파트에서 늘 공을 차고 있어서 자주 보이던 익숙한 얼굴이다.







아, 얘가 준서구나.







 며칠 전 아파트에서 축구 좋아한다는 아이들이 항상 모여있는 공터 옆 벤치에서 물 먹는 모습을 모았었다. 짧은 머리에 까맣게 탄 피부를 하고 있는 남자애로만 알고 있었는데 마스크를 벗었는데도 그 모양대로 입 주변은 뽀얀 피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애기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쿡 웃었던 기억이 났다. 



이내 다음 알림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반 대표를 맡은


채윤 엄마 이현주입니다.


지원하는 분이 아무도 안 계셔서 


선생님 부탁으로 회장 엄마가 


반대표를 맡게 되었네요.


앞으로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반톡 만들었나보네. 







안녕하세요, 총무를 맡게 된 


아린맘 정연지입니다.


아린이가 부회장을 해서 


제가 총무를 하게 되었어요.







연지도 카톡을 남겼다.







반가워요.







감사합니다.






뒤이어 반 엄마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하, 이렇게 또 하루가 살아지는구나.


오늘은 진짜 술 안마셔봐야지.







 연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오자 아까 집에 도착해 방에서 줌으로 화상영어 수업을 하고 있는 아린의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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