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의 무게는 견적서의 ‘금액’에만 있지 않았다. 업체가 건넨 공정표에는 무려 9주라는 긴 시간이 적혀 있었다. 돈만큼이나 시간 역시 우리에겐 큰 부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도인의 배려로 잔금을 치르기 전 한 달가량의 공사 기간을 벌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역부족이었다. 살던 전셋집은 비워줘야 했고, 들어갈 집은 공사 현장이었기에, 우리는 두 달 가까이 집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길바닥에 나앉은 신세’. 법적으론 집주인이었지만 물리적으로는 갈 곳이 없는 기이한 신분 상승이었다.
짐을 맡기기 위해 살림을 줄이는 일은 또 다른 고역이었다. 짐이 많아질수록 보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본 사이즈인 5톤 양에 맞춰야 한다는 게 업체의 설명이었다.
‘언젠간 입겠지’ 하며 모셔둔 옷, 읽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던 책, ‘1+1’ 행사로 쟁여둔 주방용품들을 솎아냈다. 신혼 초 남편이 산 튼튼한 책상과 예뻐서 충동구매한 내 책상도 과감히 떠나보냈다. 세월만큼 추억도 켜켜이 쌓여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추억은 물건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부피를 덜어냈다.
남은 짐은 5톤 트럭에 실려 떠나갔고, 이사갈 집은 공사가 한창이어서, 세상에 우리 둘만 덜렁 남은 느낌이었다. 집을 샀다는 사실은 서류로만 존재했고, 우리의 삶은 여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다. 집을 샀는데, 집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 곳이 없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상황에서, 숙소비라도 아끼는 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에 가까웠다. 결국 우리는 염치를 잠시 접어두고 양가 부모님께 SOS를 쳤다. 공사 기간 동안 나는 친정으로, 남편은 시댁과 회사 오피스텔을 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집을 위해 기꺼이 ‘자발적 이산가족’이 되었다.
남편은 본가로, 나는 친정으로. 표면적으로는 각자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는 공평한 결정 같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 무게가 다름을 직감했다. 오랜만에 부모님 댁으로 돌아간 남편은 따뜻한 밥상을 받는 ‘아들’의 위치로 돌아갔을 테지만, 나의 귀환은 조금 달랐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13년. 아빠만 홀로 남은 나의 친정은, 내가 떠나있던 세월 만큼이나 곳곳에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미혼인 남동생이 주말마다 들러 살림을 챙긴다고는 했지만, 이 역시 힘에 부칠 수밖에. 특유의 무심함과 헐거움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고무장갑부터 껴야 했다. 냉장고 구석에 말라비틀어진 식재료를 치우고, 뽀얗게 쌓인 묵은 먼지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나는 잠시 얹혀살러 온 딸이 아니라, 멈춰버린 이 집의 시간을 다시 돌리러 온 사람이라고. 인테리어가 끝나면 나는 화려한 새집으로 떠나겠지만, 이 집에 남을 사람은 아빠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려, 걸레질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집 없는 설움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채감이 뒤섞인 채, 그렇게 친정에서의 첫 번째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