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 ⑩
잠결에 한기를 느꼈다. 이불을 덮은 채였지만 간절기 홑이불이라 온기가 적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알알, 코가 맹맹. 포근한 니트 양말을 꺼내 신었다. 발만 따뜻해도 좀 살 것 같다. 거실로 나오자 사뭇 공기가 냉랭하다. 어느새 가을의 한가운데구나! 실감하는 아침.
‘여름 끝, 가을 시작’이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어서 귀뚜라미가 언제부터 울었는지, 하늘이 얼마만큼 높아졌는지, 하다못해 긴 소매 옷을 꺼내 입은 날짜까지 기억하던 나인데 어째 이번 가을은 어떻게 시작돼 무르익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태풍 링링과 추석 연휴 그리고 다시 태풍 타파와 미탁을 연이어 치르니 이 즈음이다.
언젠가 모임에서 제주의 사계절 중 최고의 계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루두루 꼽히다 결국 최고의 계절은 ‘가을’에 돌아갔다. 사계절 다 아름답지만, 그중에 ‘가을’을 제일로 치는 사람들이 (적어도 그 자리에선) 많았던 셈이다.
나도 가을을 골랐고 ‘역시 그렇지!’ 하고 힘을 얻어서일까 이 무렵이면 그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티끌 없이 높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초록 들판 위의 말들이 낮잠을 자고, 오름마다 은빛 억새가 번지는 장관은 정말이지 찌무룩한 여름을 견딘 우리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 같다.
선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는 원시 시대 때부터 행해져 왔다고 한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에는 기쁘게 주는 의무와 고맙게 받는 의무, 나중에 그걸 갚는 의무가 있었다는데 그중 하나라도 어기면 당시에도 부족 생활이 아주 피곤해졌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배시시 웃음도 나고, 이내 이런 단상도 따라온다. 어쩌면, 청명한 가을이 자연의 선물이라 생각한다면 잘 받고 또 잘 갚기 위해서 조금 다른 마음으로 가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건 야속하리만치 금방 지난다. 청춘도, 영광도, 그리고 가을도. 더욱이 가을은 이상기후로 더 짧아지는 중. 봄, 여어어름, 갈, 겨어어울, 이란 말을 쓰게 된 지도 벌써 몇 해쯤 된 것 같다. ‘만약 새라면 나는 연속적인 가을을 찾아 지구를 날아다닐 거’라던 영국의 소설가 조지 앨리엇의 말이 해마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다.
하지만 청춘이나 영광은 즐기지 못하는 자에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나 누리는 자에겐 머무르는 별빛이라는 것도 알고 있음이다. 그러니 이 계절을 오롯이 즐기고 누린다면, 새가 되어 가을을 찾아 지구를 날아다니는 것 이상으로 가을을 내 곁에 오래 둘 수 있지 않을는지.
여름의 열기가 물러난 차분한 바다도 좋고 한갓진 목장과 억새 만발한 오름도 좋겠다. 하기야 길가의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이름 없는 밭에 뽀얗게 내려앉은 메밀꽃까지 걸음걸음마다 제주엔 가을이 뿌려져 있으니 어딘들 어떠리.
자연이 준 선물을 고맙게 받을 시간. 그걸 갚겠다는 마음을 심는 시간. 자연과 사람이 모두 아름다워지는 계절, 바야흐로 가을이다.
[김민정의 제주산책 walk&talk]는 동명의 제목으로 제주도의회에 연재 중인 칼럼을 묶은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