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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Aug 08. 2020

커피의 시간

바쁜 일상 중에 나를 나로서 만나는 시간, 여러분은 어떤 것이 있나요?

커피 빈약하게 한 스푼 반, 프림 인심 좋게 푹 담아 두 스푼, 설탕 보통으로 두 스푼! 

나의 비법 레시피이다. 맛의 차이는 ‘빈약하게’와 ‘인심 좋게 푹 담아’의 미묘한 양 조절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엄마들의 요리 지도 때 나오는 ‘간장 적당히’의 ‘적당히’와 같은 것이다. 집안에서 알아주는 바리스타였지만 커피는 나에게 금기의 것, 어른들의 음료였다. 그럼에도 식후 정리 중인 식탁 한편에 자리를 잡고, 서걱거리는 검은 알갱이와 아기 냄새나는 프림, 달콤한 설탕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역할이 꽤 만족스러웠다. 팔팔 끓인 물을 붓고 몇 번 저으면 확 퍼지는 냄새, 그렇게 들큼하고 구수한 것은 어린이의 먹거리 중엔 없었다. 혀로 맛보지 못하는 커피를 코로 들이키며 음미하는 일은, 손님을 위해 열심히 진미를 만들어 내보내고 정작 본인은 단순한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셰프의 이중생활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보우하사 이따금 한 모금을 남겨주곤 했는데, '호로록호로록 호로…' 빈 잔과 목구멍 사이에 공기 터널을 만들어 쓸어 담기를 반복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빨리 어른이 돼서 마음껏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몇 번을 호호 불며 나누어 마시는 어른들의 우아한 손길들을 보면서 커피에 대한 나의 집착은 점점 커졌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른 지 며칠밖에 안되었는데, 갑자기 많은 것이 허락됐다. 대학교 로비의 자판기에서 100원짜리 커피를 꺼내 들고 '대학생, 이제 어른이다.' 중얼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커피보다 코코아를 더 많이 뽑았다. 카페에 가도 과일 주스가 더 당겼다. 그간 품어 온 집착이 무색하게, 다른 것들을 만끽하느라 커피에는 무심했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성공했다. 직장인들의 식사 코스 마지막이 바로 커피였는데, 카페에 가서는 커피를 받아 바로 밖으로 나왔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카페는 거대한 유인 자판기 같은 곳인가 보다 생각했다. 선배들이 사주는 낯설지만 고급스러운 맛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지만, 카페 출입은 내겐 너무 호화롭게 느껴졌다.


회사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야근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말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제법 차가운 겨울 냄새가 섞인 11월 공기를 가르며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억울했다. ‘뭐 한다고 이렇게 빨리 회사에 다녀서’ 입이 썼다. 삐뚤어져야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다. 주변을 급하게 째려봤다. 어둑한 길에 동그란 녹색 간판, 그 안에 물고기 몸통을 가진 여자가 환하게 나를 불렀다.


"라테 주세요."

선배들의 전갈 없이 주문을 직접 해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소개팅에서 주선자가 자리를 뜬 후, 둘만 남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어색했지만 대수롭지도 않았다. 거대 자판기의 용처에 맞게 밖으로 들고 나와서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더 선명해진 코와 혀가 기미상궁 노릇을 하건대, 향도 좋고 부드러운 것이 과연 수고한 내가 즐길만한 수준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있구나. 그래서 이런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거야. 점점 더 멋진 직장인이 되고, 힘들 때는 나한테 상도 주는 거지.’ 조금 힘이 났다.


그날 저녁 후, 나에게 수많은 상을 내렸다. 관대한 시상자는 일찍 일어난 출근길에, 오늘 하루 잘 보냈다고, 비가 와도 회사에 나온 게 기특해서, 눈이 오는데도 나가 놀지 못하니까, 날이 상쾌하면 더욱 파이팅을 외치는 의미로 상을 줬다. 커피값은 소비의 시대를 꼬집는 주범으로 언급되기 일쑤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될까?' 마음 졸이는 일에 무감해지고, 핑계로 삼았던 상이란 개념도 없어졌다. 급기야 마시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애정 결핍에 걸린 사람처럼 무기력했다. 생각과 판단이 배제된 본능과 습관의 영역이었다. 중독. 나는 커피 중독이었다.


중독이 완벽한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 것은 아메리카노가 좋아진 때이다. 아메리카노로 말할 것 같으면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이 하도 맛있게 마셔서 따라 샀다가 쓴맛을 본 적이 있다. 블루칼라였던 주인공이 일과 전에 마시더니 그들의 새참 소주 격이었던지, 난 써서 마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했다. 반전은 한참 뒤 커피를 주제로 소설을 쓴 작가와의 만남 자리였다. 유명 바리스타도 초청되어 한켠에서 커피를 내렸다. 핸드드립이라길래 써서 나는 안 마시겠다고 말할 틈도 없이 손에 쥐어졌다. 흘릴까 봐 양을 줄일 생각으로 조금 호로록 하는 순간! 밀림의 축축한 흙 맛을 느꼈다. 열대의 낙엽, 새와 들짐승들의 배설물이 풍족한 비와 섞여 켜켜이 삭은 흙, 그 어떤 잉태도 가능할 비옥함을 가진 맛이었다. (와인 맛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분들을 보면서 분명히 취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드린다.) 약간 지린 향과 함께 느껴지는 신맛, 혀에 닿는 고소함과 목구멍 가까이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탄 맛의 조화! 이 진액에 뭘 타 먹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이후 커피 중독은 더 심해졌다.


비 오는 날은 아메리카노다. 봄과 겨울은 왠지 아메리카노다. 아침은 대략 아메리카노다. 오후 5시쯤에는 단 것에 절대 아메리카노다. 이것은 처음 반 팔을 꺼내 입는 날엔 아이스 라테, 가을에는 카푸치노, 감정의 허기가 질 때는 카페모카, 캠핑에서는 믹스커피, 식빵 찍어 먹을 땐 흰 우유 섞은 믹스커피의 짧은 한 눈 팔이에 비해 거의 절대적인 신뢰, 내 생활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본다. 

오래된 연인을 새삼스럽게, 찬찬히 바라보듯이. 그런데 아메리카노 안에 내가 보인다. 호 불면 흩어졌다가 잔잔해지면 다시 나다. 나르시스처럼 커피에 비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이상의 시 <거울> 중 일부인데, '거울' 자리에 '커피'를 넣고 읽어본다.

커피 때문에 나는 커피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려 마는 커피가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커피 속의 나를 만나보기라도 했겠소.

 

정말 커피를 통해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시간은 나보다 빨리 흘렀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짬을 만들 필요가 생겼다. 호호 불어가며 천천히 음미하는 커피의 시간 같은 것 말이다. 한숨을 돌리고, 어리광을 부리며, 모범생 같은 생활에 조금의 삐딱함을 허락해서 균형을 맞추는 기회! 출산 후 산후우울증을 겪었다던 친구가 “수유한다고 커피도 못 먹는 게 제일 힘들더라. 라테 한 잔 사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맙더라.”했다. 또 식당 아주머니께서 설거지를 마치고 믹스커피를 타시더니 “일 다 끝내고 이거 하나 먹는 게 낙이지 뭐.” 하셨다. 어른이라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척척해낼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쉽게 괜찮아지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되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벅찬 생활을 살아내느라 늘 분주하다. 그래서 중독이 필요하다. 잠시 이기적으로 나만 볼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이로써 지친 나를 보듬고 또 무엇이든 계속해나갈 힘을 얻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어르신들이 커피 마시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은 내가 '달콤하고 시원한, 그러나 녹기 전에 먹어야 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씁쓸하지만 구수한 커피의 시간'을 묵묵히 음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리추얼(Ritual)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조금 거칠게 표현한 중독은 작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자주 하는 것이 포인트다.

 

"난 무민 캐릭터 모으잖아. 귀여우니까."

"복권 사. 당첨되면 뭘 할지 생각하는 거. 하고 싶은 게 계속 달라지는 게 신기해. 당첨 안 되면 또 사면되고."

"남편이랑 길게 하는 대화? 뭔가 둘이 대화하다 보면 이래서 우리가 결혼할 수밖에 없었지 하는 공통점이 나오거든요. 그때가 좋아요."

"스카프나 목도리 사는 거? 모든 색깔과 질감이 다 필요해! 평소에 봐 뒀다가 세일하면 고르고 골라 일 년에 한두 개씩 사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

 

친구들에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은 중독'에 대해 물어봤다. 그리고 참 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중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뽜사한 기분이 들어서 손수건을 보거나 사는 거 좋아."라고 한 친구에게는 "손수건 같은 하루를 보내자!"라고 인사했다. 각자 다른 중독을 갖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중독인데, 듣고 있는 나마저도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은 중독에 대해 묻는 것'에 중독될 뻔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커피를 더욱 마음껏 마시겠다. 이것으로 나에게 짬을 주고 응원하고 더 가보자고 북돋을 것이다. 입에 쓰더니만 역시 (적어도 정신) 건강에 좋은 거였구나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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