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거리를 둔다
아라만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살았습니다. 구릿빛 피부, 탄탄한 근육이 알맞게 붙은 다부진 체구의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아라만다는 한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엄마가 되면서 더 농밀해져 갔습니다. 성격도 쾌활하고 다정해서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길에 나서면 많은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느라 바빴습니다.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녀는 늘 환대받고 신뢰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달 보름이 되는 날 저녁에 사라져 다음 날 동이 틀 무렵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녀가 그 시간 동안 마을에 없다는 것이 확실했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지 본 사람은, 남편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그런 궁금증은 그녀의 싱싱하고 건강한 웃음과 마주하는 순간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보름 저녁이 되면 마을과 멀리 떨어진 숲에 갑니다. 축축하고 검은 흙 냄새, 풀 비린내가 나는 숲의 깊은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자리에 도착해 옷을 벗고 눕습니다. 곧 발등에서부터 허리까지 노란 털이 기지개를 켜듯 올라옵니다. 새들과 살쾡이가 와서 그녀를 지킵니다. 아라만다는 한 달에 한번, 노란 꽃이 지지 않는 숲에 누워 보올갛게 물드는 하늘을 보면서 평온한 하룻밤을 자고 갑니다.
작가가 글 대신 그림으로 쓴 옛날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할 만큼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위와 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반인반수인 여자를 ‘아라만다’라고 부르기로 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이름 후보는 ‘건녀’였다. 건어물녀1)에서 따왔다. 한주를 가까스로 끝내고 퇴근한 금요일 저녁에 아무 약속도 없이 내 원룸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참 좋았다. 현관에 자동으로 켜지는 불빛에 비호를 받으며 신발을 내팽개치고, 아무데나 가방을 밀어 두고 곧바로 양말을 벗은 후, 거실인지 방인지 구분 없는 바닥에 벌러덩 누우면 현관의 자동 불빛도 때맞춰 꺼진다. 커다란 복층 통창으로 들어오는 외부의 불빛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해지는 동굴 같은 집에 대자로 누워서 주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월요일을 맞기까지 거의 비슷한 몰골을 유지한다. 맘껏 자고, 엎드려 책을 읽고,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고, 비스듬히 누워서 밀린 TV를 본다. 하도 바닥에 있으니 끝내 시야에 걸리고 마는 먼지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갑자기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며 (청소는 안 하고) 훌쩍 일어나서 나간다. 우리 동네 일등 마트라는 곳에 가서 이것저것 사다가 요리보다는 궁리에 가까운 간편한 끼니를 해 먹거나, 힘이 좀 더 있으면 혼자서 영화나 궁금했던 전시회, 핫플레이스에 가보기도 한다. 주로 충동적으로 나서니 약속을 잡을 수도 없다. "아가씨가 왜 혼자 다녀요?"라는 인사동 가게 주인아줌마의 말에 "친구가 없어요"하고 너스레를 떨 만큼 그런 시간이 익숙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어디 선거 나가냐’고 할 만큼 인사를 주고받는 친구들이 많았어도 주말에 나가노는 일은 드물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 때 열흘 동안 집에만 있은 적도 있다. 자고 먹고 동생을 시켜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돌려가며 끊임없이 영화를 보던 때를 지금까지도 손에 꼽는 황금 시절로 생각하고 있다. 말도, 웃음도 많은 편에 속하지만 동시에 늘 혼자 있는 시간을 갈구한다. 그러니 굳이 왼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건녀’ 아니 ‘아라만다’가 낯설지 않았다. 비록 그녀만큼 아름답고 인기가 많지 않아도, 남편 또는 자산만큼 든든한 미래(에)‘애’셋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근육보다 지방이 더 많지만, 그래도,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홀가분함을 단박에 알아챌 수는 있다.
게으르거나 외로워 보이는 나만의 시간을 여러모로 바꿔 보려고도 했다. 보고 싶은 친구들도 많고 함께 있으면 참 좋다. 혼자 다니지말고 자신들을 부르라고 살가운 인사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미안하고, 동시에 이런 소리가 나올 지경이면 곧 왕따를 면치 못할 것 같은 위기감에 새로운 다짐을 해보는데, 은둔병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진다. 아이가 청년이 되는 성장의 시간을 넘어, 주어진 역할을 꾸역꾸역 해내는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성숙의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혼자 남아 별일 안 하는 시간에 연연하는 것 같다. 모자란 나에게는 다소 버거운 역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내내 긴장하는 나 자신에게도 시간을 줄 필요가, 때로는 위로해줄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길을 걸을 때 잠깐의 그늘에서의 쉼 덕분에 앞으로 더 걸을 수 있듯이, 일상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나를 놓아주고, 쉬게 하는, 내 시간을 확보해야 더위 먹지 않을 수 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사람마다 성향도 다르고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 다르므로 ‘그 시간’이 꼭 나와 같을 필요는 전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모든 역할로부터 구해내고, 혼자 내버려 두어야 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얼마만큼은 꼭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농사지을 때조차 휴경기를 두고 땅을 놀린다고 한다. 서구에서도 7년마다 땅도, 사람도 쉬게 했던 안식년이 몇 천 년 전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흙조차도 내버려 둬야 계속 생명을 품어 낼 수 있다고 하니, 자연의 하나인 우리가 다를 리 없다. 우리도 쉬어야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
'아라만다'는 그림 속 노란 꽃의 이름이다. 꽃말은 ‘희망을 가지세요’이다. 그림 제목이 <아라만다의 그늘>이라는 점은, '희망이 만들어주는, 그래서 쉴 수 있는 그늘'도 될 수 있고, '희망조차 품고 있는 어두운 그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그늘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늘의 시간을 갖고 나야 또 희망을 가져볼 힘이 생긴다. 건어물녀는 월요일에 누구보다 화장도 잘 받고, 세련된 활기가 넘칠 것이다. 주말에 맨얼굴로 실컷 잘 쉬었기 때문이다. (내가 월요일에 푸석한 것은 좀 더 치밀하게, 열정적으로 쉬지 못한 이유일 것이 분명하다.)
천경자(1924-2015)를 한의 화가라고 한다. 스스로 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림들에서 한보다 훨씬 적극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녀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그녀답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천경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유학을 반대하며 결혼해서 정착하기를 바랐다. 아버지에게 유학 문제로 꾸지람을 듣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하하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놀라서 쳐다보는 아버지를 보고 이번에는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미친 척을 해서 결국 바라던 승낙을 받았다. 유학. 그녀는 떠나며 옥자라는 본명을 버리고 ‘경자’로 개명했다.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자, 이름도, 사랑도, 그 시절에 세계 여행도, 절필의 시점도, 모두 그녀 스스로 정한 여자. 고통과 슬픔에 주눅 들지 않고 맞짱을 떠 버리는 화가의 에너지가 그녀의 그림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천경자의 많은 그림 중에서도 <아라만다의 그늘>이 좋은 이유는, 이 에너지 넘치는 여자의 널브러진 모습이 (비록 그림의 여인의 몸뚱이가 동물일지언정) 가장 인간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거울 경’이란 것도,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는 ‘아라만다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1) 건어물녀: 일본의 '호타루의 빛'이라는 만화에서 유래. 직장에서는 매우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츄리닝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고 맥주와 오징어 등 건어물을 즐겨 먹는 여성을 지칭. 일에 지치고 집에서 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미팅이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쉬는 것을 좋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