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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27. 2020

꿈에 그리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잠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씨에스타(siesta) 1)에 들려던 스페인 사람의 말이었다. 맞다. 내가 잠을 좋아했다기보다 잠이 귀찮으리만큼 나를 따라다녔다. 


어렸을 때는 잠이 번거로웠다. 내키지 않는데도 어른들이 잠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부추겼다. 맘에 들지 않는 친구를 내게 맡겨둔 기분이었다. 빛 나고 신기한 것들과 한참 놀다가도 때가 되면 침침한 곳에서 오도카니 나만 기다리고 있는 잠과 놀아줘야 했다. 잠도 눈치가 보였는지 꿈이라는 이야기로 심심치 않게 해주려고 했다. 가끔은 내가 저 때문에 끝내지 못한 놀이를 보여주고, 때로는 삐졌는지 무서운 이야기로 놀라게 하기도 했다. 끝이 없는 이야기를 가진, 꽤 말이 많은 친구였다. “몇 밤 자면 되는데?” 가족과 떨어져 낯선 시골 외가에서 한 달여 보내야 했던 여름, 다행히 잠이 옆에서 함께 날을 세어주었다.


그렇게 정을 들여놓았건만, 학교에 들어가니 잠과 가까운 것이 눈치 보이는 일이 됐다. 잠이 게으르다는 둥, 잠과 친하면 훌륭해지지 못한다는 둥 모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나와 잠이 더 애틋해졌는지도 모른다. 늦잠, 단잠, 낮잠, 선잠.. 다채로운 구애에 나는 늘 정겹게 답신을 했다. 그러니 에피소드도 많다. 어떤 방과 후에는 열쇠도 없었는데 기별도 없이 집에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잠이 급히 찾아와 속수무책으로 집 앞에 책가방을 베고 거나하게 한 잠을 잤다. 초등학생이었으니 망정이니 보기에 흡사 취객의 자태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를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택배 상자처럼 급히 챙겨 들어왔다. 한번 잠에 빠지면 어찌나 깊은지, 분명히 거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방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면, 어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놓고 생각이 안 나느냐는 익숙한 타박이 쏟아졌다. 1시간 남짓 걸리던 대학 통학길에 전철보다 버스 타기를 좋아했다. 쪽잠 자기는 버스가 알맞다. 우리 집에서 몇 정거장 더 가야 있는 버스 집하장까지 가서 내린 것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참 개운했다. 하필 회사 대표님과 정면으로 마주한 자리에 앉아서도 곤히 잤다. 옆구리를 찌르던 과장님의 손길도 잠과 나의 사이를 떼어놓지 못했다. 고작 세 명이서 진행 한 미팅에서 존 것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한번 만난 잠과 헤어지긴 또 어찌나 어려운지, 차리라 늦은 밤까지 잠에 안 들면 몰라도 일찍 잠을 물려 깨나는 일이 한 번이라도 쉬운 적이 없다.


이렇게 오래도록 가까운 친구를,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히 대하기 시작했다. 대신 주말 아침은 정오까지 꽉 채워 잤다. 그걸로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잠과 밀리 회포를 풀었다. 황금 같은 주말 아침이 아까워서 일부러 조조 영화를 보기도 해봤지만, 그간 보고 싶었다며 질척이는 잠이 늦은 오후께 다시 찾아오고, 난 또 마음이 약해져 까무룩 잠이 들고 하는 바람에 관뒀다. 


그런데 언제부터 잠이 변했다. 늦은 밤까지 오지 않는 날이 더러 있더니, 작정하고 자려던 주말에도 9시 정도만 되면 눈이 떠졌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새벽에 훌쩍 깨워 놓고 다시 오지 않는 건 심했다. 알람을 서너 개 맞추어 놓아도 차마 보지 못했던, 새벽의 푸릇한 공기 안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때, 정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단단히 성이 난 것 같은데, 이렇다 말도 없으니 그간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나 싶다가도, 수면유도제까지 삼키게 하는 꼴이 사나워서 ‘오면 오고 말면 말아라.’ 나도 대충 잊고 지내기로 했다. 


그러기를 몇 해 째 이어오다 어떤 비행에서였다. 장거리 일수록 잠도 실컷 자고, 영화도 봤다가, 맛있는 것 먹고, 방해 없이 생각도 하다가 다시 잠들곤 하는 비행기 안의 시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없는 기내 안이 그렇게 갑갑할 수가 없었다. 영화도 보기 싫고 생각도 멈추어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혹시 기내가 불편해서 그랬나 싶어서 돌아오는 길에는 의자가 침대처럼 눕혀지는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심지어 밤 비행인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가 옆 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는 청년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그만 눈물이 났다. 익숙해진 섭섭함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어째서 잠과 이리 서먹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조는 사내아이> 김종태, 1929, 45.5×37.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1929년의 덜컹거리는 전차 안, 서로 마주 보는 자리이다. 앞에 까까머리 사내아이는 통성명도 하기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차와 함께 흔들거리며 머리를 떨구고 잠이 든 사내아이를 보는 화가 김종태(1906-1935). 아이는 잠에게 선택받고, 자신은 받지 못했다. 아마 그에게도 잠은 이미 그리운 동무가 된 것인지 모른다. 오랜만에 동무의 얼굴을 소년에게서 보면서 여전히 정겹고 따뜻한 잠의 모습을 그림으로 잡아 두었다. 조는 사내아이를 보면서 선잠이나 쪽잠이 아니라 단잠이 그려지는 것은 분명 그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이불 같은 기운의 끝자락을 슬며시 잡아 끌어와 덮고 싶을 정도다.


김종태(1906~1935)는 생전에 이미 선망받는 화가였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를 하고 있던 중, 독학으로 그린 그림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당시 환쟁이를 화가로 만들어주는, 유일하고도 권위 있는 창구였다. 1926년부터 4회 입선 6회 특선이라는 진기록에 더해 일본에서의 정식 화가 등용문인 이과전(二科展)에도 입선하면서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얻었다. 독학의 덕인지, 당시 화풍에서 찾아볼 수 없던, 유화를 수채처럼 그리는 화법, 조선의 색을 사용하는 특색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년도로 보아 <조는 사내아이>는 그가 한창 활동하던 때에 그려진 그림이다. 스믈아홉살의 그는 개인전을 열기 위해 평양에 방문한 사이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 일로 영원히 잠과 여행을 떠났다. 이후 그의 친구들이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는데, 9여 년 동안의 화려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이 고작 대여섯 작품이다. 식민시기와 전쟁을 겪어 낸 한반도가 그의 작품을 지켜낼 겨를이 없던 탓이다. 몇 점이 되는지도 모르는, 진기록을 세울 만큼 칭찬받았던 그의 수많은 그림들도 영원한 잠의 선택을 받았다. 남겨진 몇 점 중에 <조는 사내아이>가 있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따뜻해 보이는 것은, 그나마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좋은 꿈처럼 들리게 한다. 2)


이제 와서 잠을 왜 이리도 그리워할까 생각하니, 좋은 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잠은 그와 떨어져 깨어 있는 시간을 건강하게 해 줬다. ‘좋은 잠이야 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살뜰하고 그리운 간호부’라고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 답게 길게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잠을 놓칠 때는 밥 맛도 없고, 기력도 없고, 웃음도 없고, 의지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깜깜한 방에 누워 잠을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들 하던데, 우리가 옛날보다 소원해지는 것이 자연의 규칙일 수도 있겠지 싶기도 하다가, 그렇다면 짧더라도 깊은,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려면 어째야 할까도 싶다. 방법을 잘 모르는 나는 오늘 밤도 여지없이 늦는 오랜 친구, 잠을 기다리며 질척일 뿐이다. 친구야 “자니..?”



1) 씨에스타: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해서 능력을 향상하는 일, 라틴어의 'hora sexta(여섯 번째 시간)'에서 기원하였다. 포르투갈 남부지방에서 시작되어 에스파냐, 그리스 등을 거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 퍼졌다고 한다. 


2)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따르면, 잠과 죽음은 형제다. 그리고 잠의 아들이 꿈이다. 옛날부터 잠, 꿈, 죽음의 역학 관계를 생각하고, 그 결과를 일가의 가계도로 정리했다는 것이 새삼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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