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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07. 2020

자화상

나에게 보내는 말


이보다 더 산뜻한 남자의 자화상이 있었던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고개 덕분에 가볍게 올라간 눈매, 굵고 짙은 눈썹은 부드러운 인상을 만든다. 금방 미소 지을 준비가 된 듯한 입술은 도톰해서 지나칠 수 없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에서 몇 가닥을 빼놓은 것이 애교스럽다. 봄 바람에 살랑거리는 듯 살짝 들린 옷깃까지 표현해낸 이 자화상을 단단한 나무를 칼로 깍아 만들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자화상> 배운성, 1927, 목판화, 파리 살롱 도톤느 입선 작품


‘가난한 집안의 넷째 아들은 학비가 없어서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대신 만석군 갑부 집에 일꾼으로 들어갔다. 천성이 싹싹하고 영리 했던 그는 주인의 눈에 들어, 또래 나이인 도련님 유학길에 동행한다.’


여기까지 보고, 스릴러물인 영화 태양은 가득히 (Purple Noon, 1960년, 프랑스 외)와 그 리메이크작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1999년, 미국)를 떠올렸다. 그만큼 영화 같은 기회의 주인공인 배운성(1901-1978)의 1919년 이야기는 다행히 휴먼 드라마 장르로 이어진다.


배운성은 도련님인 백명곤의 말동무 겸 몸종만은 아니었다. 주인 백인기의 후원으로 공부를 이어간 결과 그도 도련님과 일본 유학을 떠났고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22년에 백명곤의 독일 유학길까지 동행했다. 그곳에서 서양 미술을 접한 후, 예술적인 충격을 받은 그는 돌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도련님과 헤어져 혼자 독일에 남는다. 이후 (언어장애를 가진) 독일인 노화가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으며 노력한 끝에 레벨풍크 미술학교에 이어 1925년 독일국립미술종합대학에 입학했다. 공부는 연구생(현. 석사)까지 이어졌고 우등 졸업생으로서 교내 아틀리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례적인 특전을 얻는다. 이렇게 한국미술사에서 '첫번째 유럽 유학파 화가'가 탄생했다.  


1920년 ~ 30년 대 유럽에서 보여준 그의 개인전시와 수상기록은 지금의 눈에도 넘치게 화려하다. 재학 시절 파리 살롱 도톤느 입선(1927),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미전 1등(1933), 파리 그랑 팔레에 출품한 총 16점 모두 입선(1938)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독일 문화원 미술분과 회원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베를린 쿠틀리트 화랑 첫 개인전(1930)에 이어 폴란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개인전을 했다. 특히 당대 세계 3대 화랑으로 꼽히던 파리 샤르팡티에 화랑 개인전(1939)은 최고의 국제 조선 화가라는 명칭을 더 빛나게 했다. 이러니 그의 작품이 독일 패션 잡지 die dame의 표지(1935), 잡지 슈피겔(1930) 등에서 발견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인생'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떠올려본다. 멀리서 보면 영화같은 성공 스토리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경제적인 지원도, 예술적 배경도, 유럽에 연고도 없던 그가 조선의 첫 유학생 화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주눅드는 일이었을 지 짐작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학비가 없어서 남의 집 일꾼으로 들어가야 할 정도였던 형편에, 당시에 환쟁이라고 불리던 화가가 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어디 쉬웠을까 말이다. 그럼에도 독일어만큼 새로웠을, 화가의 언어를 배워 몇 년만에 입을 뗀 작품이 <자화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파리 살롱 도톤느에 입선하자 자신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되려 수상 이유가 '<자화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에너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싱싱한 힘이 있다. 그 동안 그가 얼마나 스스로를 응원했는지, 기도해주고, 다독였는지 그리고 어찌 보면 무모한 선택을 한 자신을 붇돋아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자화상으로 하여금 무섭고 깜깜했던 지난 날의 여정을 희극적인 분위기로 정리해둔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알 것 같다. 자신을 그렸다기 보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그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반면, 자신에게 가장 엄격하고 다그치는 사람이 본인이 경우가 참 많다. 내가 그렇다. 특히 실패에 대한 불안이 컸다. 학교 다닐 때도 시험 잘 봤냐는 질문에, 잘 본 시험 조차 성적표가 나오기까지 먼저 결과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못 본 시험까지도 잘 봤겠지 기대를 하는 어른들이 계시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조심성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어도 보여줄 명확한 결과가 없으면 말을 안했다. 허풍쟁이처럼 보이기 싫었기때문이다. 소개팅에서 거절 당할 것이 마음이 쓰여서 아예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았던 적도 있고, 이루어지기 힘든 도전은 하지 말아야 할 핑계를 찾는데 힘을 쓴 적도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최대한 뻗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맛을 보고, 거기에 더해 열심히 뻗었으나 잡지 못했을 때 조차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웃어주어야 하고, 붇돋아 줄 사람은 나 뿐이라는 걸 더 선명하게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보통 무관심해보이거나, 매서워 보이거나, 심지어 내려다보는 듯한 자화상들 중에서 약간 웃는 표정까지 비치는 배운성의 <자화상>은 내게 참신한 힘을 준다.


배운성의 자화상은 '나'를 그리는 것에서 '우리나라'로 확대되었다. 그의 소재 중 많은 부분이 우리나라의 풍습, 풍경, 색채였고, 이런 독특함이 유럽 화단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은 그만큼 매력적이다. 베를린에서 파리로 옮겨와 살던 배운성은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선으로 돌아왔다. 피카소, 샤갈 등 거장들이 머물렀던 라 뤼슈의 예술가 공동아틀리에에 167점의 작품들을 남겨두었는데, 전쟁 후 아틀리에 창설자가 보관했다가 행방불명 된 것으로 알려졌다. 18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우리 나라의 이야기를 열심히 전한 그였다. 오늘날에도 관심을 한데 모을 이력을 이미 1900년대 초에 일궈낸 화가에 대해서 이토록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 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친일 행보를 걸었고, 월북 했다는 점이 애써 모른척해야 했던 이유가 되었다. 다행히 1999년 파리에 있던 한국 유학생이 배운성의 원화 47점을 발견했다. 한국 근대기의 상처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 진정이 되어 그의 자화상과 눈을 맞출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아무것도 없어서 더 온 힘을 다 하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했고, 만들어 낸, 한 조선인 화가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지금, 내가 그리는 자화상은 어떤 표정인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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