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을 꿈 꿀 것, 마음껏!
우리 동네에 노숙자 한 분이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면 나타나 매번 같은 전봇대에 기대어 앉았다. 가로등 빛 아래서 접어 올린 한쪽 다리에 작은 노트를 대고 늘 무언가를 적었다. 날이 추우나 더우나 같은 옷을 입고, 산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행색이었지만, 여느 노숙자처럼 술냄새가 나거나 울화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적인 (노) 숙자 씨’라고 별명을 붙여두고 혹시 시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힐끔거리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적고 계시냐고 끝내 물어보지 못한 이유는, 조심성이었을까? 경계심이었을까? ‘지적인 숙자’씨의 외형이 이쾌대의 걸인과 꽤 닮았다.
누더기에서 드러나는 체구가 다부지다. 봉두난발도 단호한 표정을 가리지는 못했다. 세 개나 되는 동냥 그릇을 보면 그가 돌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고, 그 위에 놓인 손등의 핏줄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걸인이지만 비굴해 보이기는 커녕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쾌대(1913-1965)다운 걸인이다. 그는 이렇듯 늘 모순적이다. 이쾌대는 당시 유복한 화가들이 그랬듯이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내내 민족주의 화가로 활동했다. 다소곳이 한복을 입은 부인 유갑봉의 초상에는 굳이 젖가슴을 봉긋하게 표현했다. 실제로는 그만큼 드러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자화상에서 그는 서양 모자를 쓰고 팔레트를 들었지만, 결국 두루마기 자락을 힘차게 날리고 있다. 열렬하고 애절한 편지를 통해 사랑을 고백한 부인과 네 아이를 남겨 두고 월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마침내 자신이 선택한 사회주의 예술 기조에 동조하지 않아서 숙청된 사상가였다. 조국과 침략자들, 동양과 서양, 남과 북과 같은 상반된 것들이 이쾌대 안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니 그의 걸인은 걸인답지 않고,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이 걸인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꽃거지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노숙자가 이슈 된 적이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검은 피부, 정리되지 않은 머리와 강렬한 눈매가 돋보이는 스냅사진 한 장 덕분이었다. 사람들이 무협영화에 출연한 장동건 같이 생긴 그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고, 중국은 물론 할리우드에서까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모교 앞 지하도에는 원만이 아저씨라는 분이 계셨다. 백’원만’ 달라고 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지금은 없어진 정문 앞 지하도 끄트머리에 선 채, 손을 주머니에 꼽고 끊임없이 한쪽 다리를 털었다. 자리에 앉는 경우도 없고, 바구니를 앞에 둔다던가 하는 적극적인 구걸도 없었다. 그래서 항간엔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목적으로 길 위에 선다는 풍문이 있었다. 1,000원을 드리면, 900원을 거슬러 준다던가, 리무진을 타고 집에 가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크게 될 학생에게만 말을 건넨다고 하니 되려 그분의 시선을 구걸하기도 했다. 몇 번을 천천히 지나친 적이 있지만, 내게 말을 건 적이 없는 것이 아직까지도 섭섭할 만큼.
그러고 보니 노숙자에게 시인, 모델, 철학자 등의 반전 스토리를 붙인 경우가 심심치 않게 찾아지는 것 같다. 게다가 이쾌대의 <걸인>을 보면, 요즘 생긴 유행만도 아닌 듯싶다. 실제 걸인의 모습이 저렇게 당당했을 리 없다. 다만, 작품이 그려진 1948년의 상황을 짐작해보면, 오랫동안 남의 괴롭힘을 당해온 것도 모자라, 이념으로 찢어지려고 하는 나라, 그 피곤하고, 치진 나라를 걸인에 빗대고, 그럼에도 그 안에 꺼지지 않는, 살고자 하는 힘,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현재 우리들의 심중도 짐작해볼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지만, 작은 일에도 쉽게 들키고 마는 우리의 피곤하고 허전한 마음을, 집을 떠나 외풍을 온몸으로 맞고 사는 노숙자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멋진 이야기를 붙여서, 그들이 맞서는 외풍이 부디 봄의 따뜻한 바람이기를 바라는 동시에 우리 안에도 늘 그런 희망과 기대가 살아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은 아닐까?
동네에 나타났던 우리 ‘숙자 씨’가 진짜 시집을 내는 상상을 한다. 달, 바람, 길고양이, 사람들의 발소리, 밤의 색깔 같은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