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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Oct 29. 2020

노안

노화의 기능

요즘 주요 관심사랄지, 걱정은 ‘늙는 것’이다. 늙어도 예쁜 할머니가 있는지 찾아보거나, 나의 노화 정도를 객관적으로? 가늠해보기 위해 연예인들의 리즈시절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보곤 한다. 내가 이십 대일 때 회사 대표님이 당신의 스무 살 때 사진을 보여주며 “마음은 아직도 늙지 않고 이때와 같은데, 몸은 이렇게 늙어버렸네.” 하는 말에 "지..지금도... 멋..있.."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갑자기 떠오르거나, “할머니들은 예쁘고 젊었을 때 없이, 처음부터 할머니였던 것 같니?”하던 엄마의 말이 이제야 괜히 뜨끔하다. 눈두덩이가 가라앉고, 표정으로 만든 주름이 출석표처럼 얼굴에 새겨지고, 두둑한 나잇살을 새삼 알아챈다던가 하는 일, 오늘만큼은 컨디션이 최고인데도 여지없이 피곤하냐는 질문을 받는 것까지는 좀 익숙해지려는데, 노안은 아직 무섭다. 이건 미용이 아니라, 신체 기능이 달라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에 대해서 쓴 책의 27페이지 끝 문장을 보며 가슴을 콩닥였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안과 의사에게 “세상에 노안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며 대답’ 


으로 페이지가 끝난다. 자, 이제 책장을 넘기면 답이 있다. 긴장되는 28 페이는 이렇게 시작했다. 


‘했다.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안 죽는 사람도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들은 것처럼 허무했다. 잠시 기대했지만 무시할 수 없게 된 노안이다. 그나저나 노안이 되면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이 더 잘 보이게 된다는데, 평생을 심한 근시로 살아온 나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산> 유영국, 1968, 136x136cm, 개인소장


삼각형은 산, 동그라미는 태양.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진한 빨강, 조금 밝은 빨강, 끝내 노란색으로 하늘색이 층층이 바래고 있다. 한나절 녹푸르던 산을 해질녁에 바라본 경험이 있다면, 산이 슬긋슬긋 보랏빛으로 변하다가 얼마지 않아 검은 밤 속으로 녹아버리는 것 봤을 것이다. 삼각형 아래에 짙은 띠가, 그저 띠일 뿐인데, 그런 기억을 끌어올린다. 추상화 앞에서 늘 추레해지는 나였는데, 산과 태양이 선명하게 보일뿐더러 낮과 밤 사이에 잠깐 들키고 마는 하늘의 복잡한 속마음인 노을의 비밀스럽고 찬란한 모습까지 느껴진다.


유영국(1916-2002)은 김환기와 함께 한국 추상화를 시작한 1세대 화가이다. 추상미술은 검은 선으로 만들어진 격자들에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을 채운 그림 (실제 그림 제목이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이 있는 구성'이다)으로 유명한 몬드리안(1872~1944)으로부터 시작됐다. 그가 1917년에 '이제껏 실제 존재하는 아름다움만 그려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정신 즉, 작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그려야 한다'(그냥 마음대로 그리자는 뜻인 듯)는 의미로 ‘신조형주의’를 선언했단다. 지금은 당연하게 들리는 논리가 신선한 충격이었던 당시,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화단에서도 보편적이지 않았던 추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 보니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과 경쟁하느니 아예 다른 것을 하자고 생각했다’고 했다. 겸손한 듯, 속물적인 듯, 블루오션을 캐치한 센스가 엿보이는 듯 역시 잘 되는 사람은 선택부터 남다르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추상미술은 태생적으로 그와 잘 어울린다.


유영국은 일본인 교사와의 갈등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일본 도쿄 문화학원으로 유학길에 오른 터였다. 문화학원은 일본 내에서도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설 전문 교육기관으로 유명했다. 지금으로 보면, 한예종 같은 형태이다. 현실을 넘어서고 싶은 식민지 청년에게 눈에 보이는 것에 간섭받지 말고 자유롭게 그리라는 화풍이 숨통으로 느껴졌을 것 같다. 게다가 어렸을 때 꿈이 바다 넘어 새로운 세계를 누비는 마도로스였다고 하니, 기존 그림의 한계를 넘고자 한 새로운 미술, 모던아트는 이전부터 그가 꿈꿔온 새로운 땅이었을 수도 있다. 


유영국은 일본 전위미술가 단체전인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193년)하며 추상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즈음 일본의 군국주의가 모든 화가들에게 전쟁을 옹호하는 그림을 강요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던 그는 붓을 놓고 고향 울진으로 귀국했다. 그곳에서 가업이던 어업에 뛰어들어 늘 가장 높은 어획고를 올리며 그림을 잊은 듯 살았지만, 그물이 무거워질수록 그의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비로소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전임, 해방 이후 새로운 정신을 추구하자는 ‘신사실파’(1947-1950) 창립으로 한국 미술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에 추상미술 즉, 모더니즘을 소개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한국 전쟁이 시작되고 서울에 남았던 그에게 이번엔 인민군이 공산당을 위한 그림을 강요했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다시 포기하고 피난을 떠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 양조장을 추슬러 열고 생계에 집중했다. 몇 대째 사업으로 유명한 부잣집의 아들이어서였는지 수완을 발휘하며 양조장을 크게 키웠을 때, 번뜩 정신이 든 듯, ‘금으로 된 산도 싫고, 금으로 된 논도 싫고, 다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부를 놓고 붓을 잡았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정말 영영 예술을 다신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그는 근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모던아트협회(1957-1958), 신상회(1962-1964) 등을 창립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1964년 48세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에는 그림 없이 지냈던 시간이 아까운 듯 교수직이나 화단에 묶여 있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59세에 처음 그림이 팔리기 시작할 정도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계속 ‘자유롭게’ 그리기에만 몰두했다. 60세가 넘어가면서 심장 박동기를 달고 8번의 뇌출혈과 37번의 입원을 하면서도 이전보다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작품 400여 점을 그렸다. 그의 자유의지가 병든 몸보다 더 힘이 셌다는 뜻이다. 그는 인생을 돌아보며,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며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붓을 몇 번이나 놓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을, 그것도 성공적으로 살아가던 그가 늘 적극적으로 그림 앞, 그의 자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 그의 평생의 주제는 숲과 나무, 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이었다. 


“산속에 들어가 산을 못 보고 내려오듯이, 산속에 들어가면 산을 그릴 수 없다. 산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원거리의 산이 보이듯이, 멀리서 바라봐야만 산을 그릴 수 있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추상화 앞에서 쉽게 추레해질 나이지만, 유영국과 그의 작품을 통해, 추상화가 추구하는 바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본질이다. 사람의 본질은 자유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단순해져야 한다. 남들의 시선, 보이는 것들, 복잡한 이유 또는 핑계들로 켜켜이 숨겨진 ‘나’를 찾는 과정이다. 


어떻게 단순해지는가? 멀리서 봐야 한다. 멀어질수록 본질과는 가깝게 된다. 몇 개의 도형과 단순한 색만으로도 산을 보고 노을을 느끼고 심지어 어둑해지는 산의 적막함까지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같은 것을 보고도 누군가는 나와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비어 둠으로써 자유롭게 되는 것도 알게 된다. 아무리 그려도 지루하지 않아서 십수 년간 산과 자연만 그렸다는 유영국과 같이 내가 느끼는 원초적인 것들에 좀 더 절실하게 매달리는 것, 사사롭고 치밀한 것들은 다 걷어내고 단지 재미있고, 행복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노안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만큼 앞으로의 시간도 기대해볼 수 있는 시점에 온다. 눈앞의 세밀한 것들로부터 저 멀리로 초점을 재조정함으로써 잠시 멈춰서 시점을 바꾸고 좌표를 정비하길 바라며 생기는 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만 나다운 것을 인정하고, 나답지 않은 것은 떼어내려는 시작. 그것이 결국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닿아야 할 곳에, 제대로,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에, 누구 하나 빠짐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잇몸 속에 숨어 있다가 사랑의 고통을 알 때쯤 살을 찢고 올라온다는 사랑니처럼 우리의 삶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시선을 먼 곳으로 옮겨 두어야 할 때쯤 찾아오는 노안은, 노화 과정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깨달음과는 별개로, 그럼에도 나에게는 노안이 최대한 늦게 왔으면 한다. 아무렴 나는 아직도 멀리 보기엔 모자란 인간이라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 오늘도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과 앞에 놓인 노트북을 번갈아 보며 탄력 있는 안구를 만들기 위한 처절한? 운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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