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생긴 일 3
방콕 오토바이의 무서움을 체감한 건 여행 첫날밤이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재즈 바에서 맥주와 함께 첫 세트를 듣고 시간을 보니 밤 10시.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첫날이라 방콕 교통이 낯설어, 세트 사이 휴식시간에 바를 나섰다.
밖을 나서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쫄딱 젖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우산이 없는 나에겐 곤란할 만큼의 비였다.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확인해 보니 버스와 전철이 있었다. 당일 오후에 지하철을 타려다가 복잡한 노선도에 꽤나 애를 먹은 나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3분 뒤면 도착한다는 말과는 달리 버스는 10분,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이미 내 앞에 다섯 대가 넘는 버스가 지나갔건만,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한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이 버스 이 정류장 맞아?"
구글 지도 어플에 뜬 버스 번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버스 번호와 역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류장은 맞아. 근데, 이거 버스 올지 안 올진 확실히 모르겠다. 원래 방콕은 버스가 10시 후에는 잘 안 오거든"
"앱에 스케줄 되어있다고 뜨는데도?"
"응. 그거랑 상관없어."
그녀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간은 거의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택시를 잡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택시 어플을 켰다. 오토바이 택시를 좋아하긴 하지만, 비 오는 날에 오토바이 택시를 탈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일반 자동차 택시를 불렀다. 아니, 부르고자 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계속된 시도에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근방에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전철뿐이었다.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복잡한 노선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고가에 있는 역으로 올라갔다.
3분을 내리 걸으니 역이 보였다. 이 역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확실치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확인해 보아도 애매했다. 여러 노선이 지나가는 큰 역인 듯했고, 나는 내가 어떤 노선을 어디서 어떻게 타야 하는지, 그리고 결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전철을 타긴 했지만, 그건 방콕 현지인 두 분과 역무원 분이 달라붙어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나는 그저 어버버 하며 그들이 도와주는 대로 따라갔었을 뿐이다.
솔직히 지금도 방콕 지하철을 어떻게 탈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문제는 표 구매부터 시작된다. 일반 결제 카드는 쓸 수 없고 1회권으로 원하는 구간만큼을 구매해야 한다는 데, 태국어 까막눈인 나는 뭐가 뭔지 확인하기 위해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대조해 가며 보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철 종류가 여러 개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카드가 없기 때문에 환승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다시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평소 같았으면 길을 잃더라도 일단 지하철을 타보자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있었다. 한국이나 호주였으면 그리 늦은시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나는 방콕에 그날 도착한 사람이었다. 잘못해서 더 먼 곳으로 가버리면 정말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먼 길을 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혹시 버스 정류장 근처라 택시가 안 잡히는 걸까 싶어 정류장 근방 1m를 전부 돌아다니며 택시를 불렀다. 여전히 아무 택시도 응답하지 않았다.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지, 전에는 고려하지도 않았던 단 하나의 선택지는 오토바이 택시였다. 설마 오토바이 택시가 잡힐까 싶었지만 일단 눌러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3초 후, 바로 오토바이 하나가 배정되었다.
택시는 그렇게 시도를 해도 한 번을 안 잡히더니 오토바이는 이렇게 빨리 잡히다니. 오토바이는 내 위치에서 3분 거리에 있었다. 콜을 취소할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오토바이 택시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오토바이가 내 앞에 섰다. 오토바이는 꽤 비싼 차종으로 보였다. 기사는 20대로 보이는 젊은 태국 남자로 우비를 입고 그 위에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는 헬멧을 벗으며 내 이름을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오토바이 번호판을 확인하곤, 헬멧을 받으려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뒤에 어서 타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손으로 헬멧 모양을 만들며 '헬멧?'라고 말했다. 그는 'No'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명백하게 나를 위한 헬멧은 없다는 뜻이었다. 원래 대부분의 오토바이 택시는 본인이 쓸 헬멧 외에도 승객용 헬멧을 가지고 다닌다. 헬멧을 쓰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몇 보긴 했지만 그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비 오는 날, 태국에서 헬멧도 없이 오토바이 택시를 타야 한다니. 머리로 비를 그대로 맞아야 한다는 것은 둘째치고 안전이 걱정되었다. 빗길에 잘못해서 미끄러지는 순간 대형 사고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지금이라도 오토바이를 취소하고 택시를 부를까? 아님 다른 오토바이 택시를 부를까? 아님 혹시 모르니 버스를 계속 기다릴까? 그 짧은 순간, 온갖 선택지가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무엇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진 않았다. 이 오토바이를 보내면 다음 오토바이 택시를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일반 택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30분째 오지 않는 버스를 더 기다리는 것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단 그 오토바이를 타기로 결정했다.
나는 오토바이 뒤에 타기 전, 그에게 몇 차례나 제발 천천히, 조심히 운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I don't wanna die라고 했을 때, 그는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우리 둘 중, 빗길 속의 운전이 걱정되는 건 나뿐인 듯 보였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빗길 위의 오토바이 질주가 시작되었다. 기사는 죽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빠른 속도로 도로를 누비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신이 있다면 제발 날 좀 살려달라고 수백 번을 빌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로 위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들 역시 우비를 입지 않은 채 오토바이 택시 뒤에 앉아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현지인이라기 보단 나 같은 여행자로 보였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헬멧을 쓰고 있긴 했지만, 나처럼 헬멧을 쓰지 않은 사람도 한 두 명 있었다.
빗바람이 얼굴을 때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간신히 실눈을 뜬 채, 혹시나 사고가 나진 않을까, 어떤 위험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하며 주위를 계속 둘러보았다.
운전은 거칠었다. 그는 중앙선을 수시로 넘고, 종종 신호도 무시한 채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때마다 내 심장을 몇 번이나 철렁거렸다. 그러나, 그런 운전은 이 기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대부분의 오토바이들이 그랬다.
실눈 사이로 보이는 건 오토바이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부처상과 태국 국왕 사진이 시선을 붙잡았다. 비가 내려서 인지 그 불빛이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들의 평온하고 경건한 모습과 아찔한 내 상황과 대비되어서인지 그 모습이 묘하게 아이러니했다.
150분 같이 느껴진 15분의 야간 질주 끝에 오토바이는 숙소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쫄딱 젖은 머리와 옷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지금도 태국 여행을 생각하면 다른 것 보다 이 날의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진 않지만, 나에게 태국의 거칠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몸소 체험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