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삶을 이끄는 질문

by 자민

나는 평소 묻고 답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도, 누군가의 질문에 곧바로 답을 내놓는 일도 어렵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좀처럼 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 하나를 받았다.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만족할 만한 답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를 막고 있는 나의 악함 또는 약함은 무엇인가.”


나는 내 안에 나를 가로막는 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면서 누구나 자기 안의 결핍과 취약함을 조금씩은 알게 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로 꺼내려 하자 선뜻 형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 짧지 않은 침묵 속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성장하며 부딪혔던 문제들, 하나씩 넘었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퀘스트들, 아프게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지나간 날들은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감정만은 아직도 형형색색으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답이 쉽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나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자주 넘어지는 지점, 반복해서 부딪히는 감정 정도는 이미 파악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바로 그 확신 때문에 오히려 더 답이 늦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막상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법이니까.


침묵 끝에 몇 장면이 떠올랐다.

가족에게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말을 건네던 순간들이었다. 걱정해서 한다는 말,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다는 말, 틀린 것을 바로잡아준다고 생각하며 내뱉은 말들. 하지만 그 말들 뒤에 남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처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정말 하고 있었던 것은 조언이 아니라 지적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을. 도움을 주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옳음을 드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순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 이것이 내 안의 악함이구나. 동시에 약함이구나.


하지만 여전히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웠다.

시기일까, 질투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어딘가 정확히 맞지 않았다. 인정욕구는 이미 오래전에 발견한 내 모습이었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답이 거기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질문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인정욕구는 씨앗이었고, 내가 마주해야 할 것은 그 씨앗이 자라난 뒤의 모습이었다.


한참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이 떠올랐다.

교만.


그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에도 나는 그것을 바로 붙잡고 싶지 않았다.

교만은 너무 정직한 말이었고, 너무 아픈 말이었다. 인정욕구는 조금 더 연약한 언어다. 이해받을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교만은 다르다. 그것은 내 약함이 타인을 향해 뻗어나간 형태다. 내 안의 결핍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낮추는 방식으로 모습을 바꾼 상태다. 그래서 인정욕구보다 교만이 더 아팠다. 인정욕구는 상처받은 나를 설명하지만, 교만은 상처를 주는 나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교만은 아주 단순한 경로로 자라났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 마음은 나를 증명하고 싶게 만든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조용히 실력을 쌓거나 삶으로 보여주는 길보다, 더 빠르고 쉬운 길을 찾는다.

그때 타인의 부족함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바로잡는 척하며 드러낸다.

그러는 순간, 상대를 위한 말처럼 보이던 것은 사실 나를 위한 무대가 된다.

나는 상대를 세우는 대신, 상대를 발판 삼아 나를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교만의 얼굴이었다.

교만은 거창한 표정으로 오지 않았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외치는 노골적인 자만으로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교만은 꽤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관심인 척, 조언인 척, 애정인 척, 책임감인 척 다가왔다.

그래서 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선한 의도가 조금 섞여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 전체를 선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마음 안에 내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함께 들어 있었다면, 나는 정직해야 했다. 그 말은 절반쯤은 사랑이었을지 몰라도, 절반쯤은 교만이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 약함은 인정욕구였고, 그 약함이 다뤄지지 않을 때 내 악함은 교만이 되었다.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낄수록, 혹은 내가 스스로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할수록, 나는 더 쉽게 남을 바로잡고 싶어졌다. 타인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순간, 내 안의 결핍은 잠시 잊히기 때문이다. 남의 틀림을 말하는 동안에는 내가 옳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안도일 뿐이었다. 결국 그런 방식으로 세운 자존감은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또다시 누군가를 지적하고 싶은 유혹 앞에 서곤 했다.


그래서 교만은 단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치유되지 않은 인정욕구가 만들어낸 왜곡된 생존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정직하게 돌보지 못했다.

그 결과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 더 우월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장보다 비교에 민감해졌고, 사랑하기보다 판단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마 진짜 성장은 내 약함을 빨리 설명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름을 끝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이다.

나는 인정욕구가 있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교만하다, 이 말은 오래 걸렸다.

왜냐하면 그 말은 상처받은 나만이 아니라 상처 주는 나까지 받아들여야 가능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나를 막고 있는 것은 단지 부족함이 아니었다.

그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내가 선택해온 방식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보다, 인정받고 싶다는 이유로 타인을 낮추며 나를 높이려 했던 태도가 나를 막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결핍이 교만으로 변해가는 내 마음의 경로다.


앞으로의 질문은 조금 달라질 것 같다.

나는 얼마나 인정받고 싶은 사람인가를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마음이 어떤 말투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관계 방식으로 변해 나타나는지를 더 살피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지적하고 싶어질 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마음인지, 아니면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인지 먼저 묻게 될 것이다.

교만은 늘 정당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에, 더 자주 의심하고 더 자주 점검해야 한다.


어쩌면 자기 이해는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인정에서부터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최근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질문은, 결국 나를 가장 정확하게 비추는 질문이었다.

내 안의 약함은 인정욕구였고,

그 약함이 길을 잘못 들 때 내 안의 악함은 교만이 되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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