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2026
정보가 적을수록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여행은 내가 가진 돈, 시간, 체력, 모든 자원을 쓰는 큰 소비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여행이 모든 자원이 집약된 소비라는 논리에 따라, 내가 좋아하는 여행크리에이터를 팔로우한다는 건 추구하는 게 비슷할 가능성이 크다.
여행은 합리적인 소비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도 사치의 영역도 아니다.
(물론 개인의 동기나 목적에 따라 합리적일 수도 사치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여행 자체의 목적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고백이다.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를 가장 큰 소비로 드러내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그래서 여행의 방향은 곧 마음의 방향이 된다.
인스타에서 블라인드투어 모집 글이 올라왔다.
보고 거의 바로 신청했다. 콘셉트가 특이했고, 블라인드 투어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까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 올진 추측하기 쉽고 딱 들어맞는다. 역시나 P성향의 사람들 주를 이룬다.
호스트 한 명과 게스트 열 명, 총 열한 명이 모였고
그중 호스트를 포함해 J가 네 명이었다.
진행자인 호스트는 파워 J였고, 그에 대한 신뢰로 참가한 사람도 J였으며, 남친과 여친을 각각 따라온 두 사람 또한 모두 J였다. 남친을 따라온 J는 계속 ‘우리 어디가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조용한 메아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이 있었다. 일정을 몰라 좀 불편했던 거라면 준비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생존을 위한 고민을 하게 된다. 평균 영하 10도를 기록하고 있는 때였기에 상의는 5겹, 하의 2겹, 어그 그리고 핫팩까지 야무지게 입고 챙겼다.
집결지에 모이면 어느 정도 알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안 알려주는 여행. 여행자보험 들어놓았으니 안심하라는 말로 더 불안하게 하고, 경부선 타고 가니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할 거라는 힌트를 주는데 도통 감이 안 온다. 지역별 계절 이벤트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니 중학교 때 배운 사회가 왜 중요했던지 이제 이해가 간다. 경부선이 서울과 부산을 이으니 경상도 쪽을 향한다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여정에 있는 지역을 맞추면 커피 쿠폰을 준다 그래서 맞추려 했으나 생각나는 지역은 너무 뻔한 지역이름뿐이었다. 한국 지역 이름을 많이 모르는 것에 새삼 고개가 무거워지더라.
블라인드투어는 고속도로부터 다르다. 내게 고속도로는 생각 정리하기 좋은 길이거나 지겨운 곳이었다. 네비가 가라는 대로 나는 속도만 잘 지키면서 가면 되니까.
하지만 행선지를 모르고 달리는 고속도로 위 풍경은 그저 흥미로웠다. 목적지를 알고 가면 목적지만 유의미해진다. 하지만 행선지를 모르고 달리는 고속도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곳이 목적지가 되었다.
인생도 그렇다. 목적지를 지울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을 살게 된다. 목적지를 모를 때에야 길은 풍경이 되고, 과정은 삶이 된다. 다시 말해, 인생의 네비게이션을 꺼야 우리는 지금을 살게 된다.
(충남 공주/청양/부여/서천, 전북 군산/부안)
서울 >> 공주 (나태주풀꽃문학관, 나태주골목길)
(133km 이동, 누적 133km)
첫 목적지는 나태주 시인의 고향, 공주다. 처음 와본다. 벽화에 쓰인 시와 그림들이 삭막할 뻔했던 골목길을 따스하게 채워준다.
문학관에 들러 이런저런 체험도 해본다. 질문카드에 쓰인 사람들에 손글씨와 내용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자니 글씨체와 내용이 참 잘 어우러져있다. 전면에 걸린 종이들을 쭉 읽어봤는데 절반 이상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내는 것. 그게 인생이지. 그거 외면하면 어떤 인생도 잘 풀릴 수가 없더라. 덕분에 나태주문학관에도 와본다.
공주 >> 은행집 (충남 청양)
(34km 이동, 누적 167km)
청양이라는 곳도 처음이다. 청양고추가 청양에서 났기 때문에 청양고추인 줄 알았는데, 청양고추의 청양은 청양군과 밀양시의 줄인 말이라고 한다. 연구원들이 신품종을 만들어서 여러 지역에서 시험 재배를 해보는데, 청양에서 맛의 완성도가 높았고, 밀양에서는 수확량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두 지역의 성과가 합쳐지면서 한국인의 식재료로 자리 잡게 되었고, 청양과 밀양의 줄인 말이 붙어 청양 고추가 되었단다.
점심으로 가게 된 집은 은행집이라는 제대로 된 재래식 청국장집이다. 호불호가 심한 메뉴인데, 과반수가 다 청국장을 시켰다. 심지어 블루리본 맛집이다. 색색의 두부도 맛있다. 청양, 구기자, 흑임자두부의 색이 너무 곱다. 그런데 한동안 차 안에 청국장 냄새가 배어 고생했다. 한 여자는 이 냄새가 청국장 냄새일 거라 생각도 못하고, 한 남자의 발냄새라고 계속 의심을 하는 재밌는 해프닝까지 덤으로 얻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진한 청국장도 먹었다.
은행집 >> 칠갑타워 (충남 청양)
(3km 이동, 누적 170km)
칠갑산은 하나의 봉우리가 솟은 구조가 아니라, 능선과 계곡이 연속적으로 포개지며 둘러싸는 형태로 멀리서 보면 산이 한 번에 드러나지 않고 능선이 층층이 겹쳐 보이는 구조다. 옛사람들은 갑옷을 일곱 겹 두른 것 같다고 보인다하여 칠갑산(七甲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봉우리가 높이 솟은 모양이 아니고 강따라 멀리 뻗은 능선은 오히려 더 깊고 고요한 힘이 있다.
칠갑타워 >> 카페지은 (충남 청양)
(11km 이동, 누적 181km)
조선시대 방기옥 고택을 카페 공간으로 활용한 곳이다. 250년 이상 된 한옥을 경험해 볼 수 있다니. 십전대보탕, 대추차, 계피생각차 등 다양한 차들이 많아서 커피를 잘 안 마시는 내겐 아주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카페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가을에 와봐도 너무 예쁠 거 같다.
카페지은 >> 부여백제박물관 (충남 부여)
(33km 이동, 누적 214km)
부여박물관 옆에 두 달 전에 개관한 백제금동대향로 박물관이다. 백제 왕실과 종교, 세계관을 한 점의 유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유물 하나뿐이다. 국사책 표지로 자주 등장하는 것만 봐도 그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정교하고 세련되기로 유명했던 백제 예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1993년에 부여군 옛 사찰 터에서 발견된 유물로 백제 문화의 격이 이 발굴 하나로 증명됐다.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금속 공예국답게 불교의 공양 의식, 도교의 신선 세계, 토착 신앙의 자연 숭배, 왕권 상징과 우주 구조를 하나의 조형 예술로 세밀하게 구현했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 놀라움이 어떨지 상상하면 내 가슴도 뛴다.
*백제금동대향로
이 향로는 단순한 종교 도구가 아니다.
백제인이 바라본 우주, 인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한 덩어리의 금속 안에 응축된 철학적 조형물이다.
향로의 뚜껑은 하나의 산이다.
수십 개의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있고, 그 사이를 신선과 동물, 구름과 바람이 흐른다. 이는 현실의 산이 아니라 이상세계, 곧 신들이 머무는 세계를 형상화한 공간이다. 도교적 신선 사상과 자연 숭배가 어우러진 이 산은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세계와 끊임없이 호흡하는 우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산 아래, 연기를 품는 몸체는 현실의 세계다.
향이 피어오르면 연기는 산을 타고 흐르며 하늘로 올라간다. 인간의 기도와 염원이 자연을 거쳐 신성의 영역으로 스며드는 구조다. 여기에는 불교의 공양 개념, 도교의 승화 사상, 토착 신앙의 자연 영성이 동시에 살아 있다.
백제의 종교는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립 대신 조화를 택했다.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태도의 시각적 선언이다.
이 조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위에 앉은 봉황이다.
봉황은 왕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천상과 지상을 잇는 존재다. 그러나 백제의 봉황은 위압적이지 않다. 날아오르기보다, 고요히 세상을 내려다본다. 이는 지배의 상징이 아니라 질서와 조화의 상징에 가깝다.
백제의 정치 철학 역시 이와 닮아 있었다.
강압보다 문화로, 정복보다 교류로 확장했던 나라.
금동대향로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연결하려는 왕국의 정신을 드러낸다.
이 향로 속 세계관은 수직적이지 않다.
하늘이 있고, 그 아래 인간이 있고, 그 아래 자연이 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모든 층위가 흐르고 섞인다.
연기는 산이 되고, 산은 하늘이 되며, 하늘은 다시 인간의 숨으로 돌아온다.
이는 “신과 인간이 분리된 존재”라는 사고보다, 모든 것이 순환하며 연결된 우주라는 인식에 가깝다.
[출처: ChatGPT]
금동대향로를 보면 종교 유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우주 모형처럼 느껴진다. 작은 금속 안에 자연, 신성, 인간, 정치, 예술이 동시에 숨 쉬고 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기술의 정교함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성숙한 세계관 때문이었다.
투어 덕분에 국보도 보았다.
부여백제박물관 >> 삼화양조장 (충남 서천)
(35km 이동, 누적 249km)
한산소곡주는 한산면에서만 생산된 밀과 찹쌀만 사용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룩을 외부에서 들여와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산소곡주라는 이름이 지닌 명성에 걸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누룩부터 직접 만들기 위해 한산면에 밀을 심고, 밀가공 공장까지 세웠다고 한다. 한산이라는 타이틀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한산면에서 나는 걸로 만드는 것. 이것이 originality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맵쌀이 아닌 찹쌀로 만든 술, 그래서 구수한 맛이 깊다. 일본에 가도 양조장은 안 가봤는데, 시음과 설명이 꽤 흥미로웠다. 저녁에 치킨을 먹는다고 하니 큰 소곡주를 흔쾌히 내어주시는 사장님의 배려에 더 취했던 곳. 덕분에 한산소곡주도 먹어본다.
삼화양조장 >> 나포십자뜰철새관찰소 (전북 군산)
(24km 이동, 누적 273km)
사람의 소음보다 날갯짓이 먼저 들리는 곳. 서해안 철새 이동 경로 한가운데 자리한 곳으로 광활한 논과 물길이 펼쳐져 있다. 동해 바다보다 더 넓은 공간감을 준다. 우리가 간 날은 너-무 추워서 인지 새 몇 마리 못 봤지만, 1월 말해질 녘이 되면 수만 마리, 많게는 수십만 마리가 무리 지어 이동하는 자연의 대장관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붉은 해가 강 쪽으로 가라앉으면 강 위에 붉은 길이 생긴다. 반짝이는 윤슬과 붉은 태양과 까만 새들이 묘한 화려함을 만들어 낸다. 내년을 꼭 기약하고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으며 지도에 꾹 표시해 두었다.
중간에 신성리 갈대밭도 들렀는데, 갈대가 예쁘지 않아서 금방 떠나왔지만, 그곳도 다시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나포십자뜰철새관찰소 >> 군산 월명동 (전북 군산)
(14km 이동, 누적 287km)
한일옥에서 식사, 이성당 빵집 투어.
철새를 본다고 추운데 좀 걸어서 그런지 몸이 얼었다. 저녁 메뉴는 한일옥 소고기뭇국. 때 되면 알아서 메뉴도 적당히 잘 챙겨주는 블라인드투어다.
이 투어에서 중요한 건 믿음이다. 사실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메뉴가 한정적이라 메뉴 자체에는 큰 기대를 잘 안 걸게 되는데, 블라인드투어에서 경험하는 지방에서의 식사는 매번 선물 같았다.
단팥빵, 야채빵이 유명한 이성당 빵집, 늦은 시간임에도 줄을 서있다.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나는 구경만 :)
군산 월명동 >> 숙소 (전북 부안)
(45km 이동, 누적 332km)
이미 늦은 시간인데 45km 더 내려가 부안에 도착했다. 저녁은 치킨. 치킨은 지방이 맛있다. 닭이 그 지역에서 조달되는 걸까. 지방에서 먹는 치킨은 실패해 본 적이 없다.
숙소 >> 변산 해수찜 (전북 부안)
(14km 이동, 누적 346km)
아침 9시 해수찜을 한다는 얘기는 감사하게도 전날 전해 들었다. 씻지 않고 그냥 잤다가 아침에 해수찜을 하며 전날의 피로를 풀었다. 정해진 인원이 개별 방에 들어가서 뜨거운 해수물에 수건을 적셔서 몸에 두르는 방식이다. 이색적이기는 한데 나는 그냥 사우나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지난날의 여독을 푸는 데는 최고였다. 4박 5일 같은 1박 2일 여정에 심폐소생술 같은 요소라고나 할까. 덕분에 초면에 나체로 함께 씻으면서 친밀도 급상승.
변산 해수찜 >> 장자도 (전북 군산)
(27km 이동, 누적 373km)
장자도는 군산 앞바다에 펼쳐진 고군산군도 중 한 섬이다. 군도는 섬들이 겹겹이 이어지는 서해 특유의 풍경을 만든다. 섬들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자갈에 부딪혀 쓸려내려가는 파도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좋았다. 이곳도 따뜻한 날 다시 찾아야지.
장자도에서 유명하다는 호떡. 호떡을 감태에 싸주는데, 맛이 좋았다. 바다 근처 호떡집들이라 그런지 감태, 물김, 파래 등 해조류로 만든 호떡이 있는게 특이했다.
장자도 >> 금강식당 (충남 서천)
(61km 이동, 누적 434km)
금강식당은 우어회백반집이다. 우어의 본래 이름은 웅어이며,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라고 한다. 바다에서 살다가 봄철 산란기를 맞아 강 하류로 올라오며, 이 시기에 잡히는 것이 횟감으로 인기가 많단다. 전어, 청어 그 어딘가의 회로 약간 비릴 수 있어서 무침으로 기본 제공되고, 회를 잘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한 우렁쌈밥정식도 있다. 이번 블라인드 투어 아니었으면 우어회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 강 근처에서 잡히는 바닷물고기, 점심 우어회도 멋진 경험이었다.
금강식당 >> 무드빌리지 (충남 부여)
(41km 이동, 누적 475km)
호스트 단골 카페라고 하는 무드빌리지에 갔다. 여기도 역시나 한옥 카페다. 부여 딸기와 밤으로 만든 음료가 유명하다던데, 난 그것도 모르고 뱅쇼를 시켰다. 햇살이 많이 드는 카페라 점심식사 후 노곤해지기 딱 좋았다.
무드빌리지 >> 오송역 (충북 청주)
(69km 이동, 누적 544km)
일행 중 2명을 중간에 내려 주기 위해 오송역에 들렀다가 서울로 갔다.
오송역 >> 서울
(133km 이동, 누적 677km)
일요일 오후 5-6시, 고속도로가 엄청 막힐 시간이지만! 버스전용차로 이용으로 굉장히 빠르게 서울에 도착했다. 항상 교통 때문에 주말에 지방 여행은 엄두도 안냈는데, 단체 투어라면 주말에도 지방 여행이 가능하구나!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가 될 ‘블라인드 투어’
여행을 소비가 아니라 경험으로 전환하려는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의 시대다.
현대 사회에서 문제는 선택의 부족이 아니라 과잉이다.
선택지가 다양해지면 만족도가 높아질 거 같지만,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더 피로해진다.
여행은 원래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다.
그러나 요즘 여행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통제의 장이 되었다. 최적의 항공편, 평점 높은 숙소, 실패하지 않는 동선, 인증 가능한 장소까지. 여행자는 쉬기 위해 떠나지만, 떠나기 전부터 과도한 계획과 선택에 노출된다.
선택하지 않는 상태가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시점에 블라인드 투어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본다.
블라인드 투어는 목적지와 일정에 대한 결정권을 외부로 이전함으로써, 여행자는 오롯이 경험자로서 여행이 주는 매력 중 하나인 ‘Serendipity’를 회복하게 되는 거 같다.
통제 욕구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심리에 있다.
여행 전에 우리는 내가 뭘 봐야 하고 뭘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책에서 본 것들을 직접 보는 그 생동감은 영상콘텐츠와 함께 이미 미미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 콘텐츠를 몸소 체험한다는 것 이상의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정보가 정보로서의 역할을 하던 옛날에는 몰라서 하지 못한 경험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정보가 되었다.
블라인드투어는 ‘무계획 여행’이 아니라, 결정권을 시스템이나 타인에게 위임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블라인드 투어의 핵심은 전적으로 호스트다. 호스트에 대한 신뢰가 쌓여야만 가능하고 유지될 수 있는 여행이다. 퍼스널브랜딩의 중요성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사례다.
내가 모리님(@traveltv.kr)을 3-4년 정도 팔로우하고 지켜보면서 나름 분석해 본 결과, 모리님은 책임감이 있고, 분석력이 있고, 원칙적인 사람 같았다.
모리가 바라본 대한민국은 어떨지, 모리가 보여주고 싶은 대한민국은 어떨지 궁금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 지역을 방문해야 할 이유를 만드는 사람이기에 어디를 가든 내가 찾아내는 대한민국의 모습보다 더 정교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블라인드여행은 다른 여행 상품과 다른 카테고리이다.
블라인드 여행은 모른 채 떠나는 자유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개념이 상품의 형태를 띠는 순간,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여행자가 사는 것은 ‘경험’이지만, 지불하는 것은 ‘기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여행 상품에서는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목적지, 숙소 등급, 일정의 윤곽이 사전에 공개되기 때문에, 소비자는 자신의 취향과 조건을 기준으로 기대치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 즉, 실망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그 범위는 비교적 통제 가능하다.
반면 블라인드 여행은 다르다. 여행자는 정보의 부재를 감수하는 대신 특별한 경험을 기대한다. 이때 문제는, 정보를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기대를 중립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람은 불확실한 대상 앞에서 평균 이상의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여행 콘텐츠라 하더라도, 미리 계획을 알고 떠났을 때보다 계획을 모른 채 떠났을 때, 기대와 실제의 차이는 더 크게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여행의 질이 낮아서가 아니라, 기대가 형성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블라인드투어는 일반여행상품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기대를 걸어야 한다. 또한 일반여행과는 다른 결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임을 인지하고 있어야 이 블라인드투어가 더 즐거울 수 있다.
블라인드투어는 내 의지가 개입이 되지 않은 만들어진 우연으로 채워지는 여행이다.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가보질 않았을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준다.
블라인드(blind)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는 투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