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 Thailand, 2016
가장 좋은 여행지는
출발 전 계획표가 아니라
경험과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스북에 10년 전이라고 알림이 뜨길래 문득 생각난 Pai. 2016년 한창 겨울인 1월에, 2주 정도 빠이에 머물렀다.
Pai(빠이)는 태국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로, ‘배낭여행자들의 블랙홀’, ‘히피들의 성지’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다.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의식(Ritual)이다. 762개의 급격한 커브를 견뎌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마을.
멀미와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빠이로 가는 모습은 차원 이동을 하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그렇게 도착한 빠이는 정말 차원 이동이라도 한 듯, 그곳의 시간은 묘하게 느리게 간다. 이건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빠이의 매력은 여러 겹으로 쌓인 역사 위에서 나온다. 13세기 미얀마에서 건너온 샨(Shan)족이 터를 잡았던 이 평화로운 농촌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보급로가 된 메모리얼 브리지의 아픈 흔적을 품고 있다. 또한 국공내전의 포화를 피해 흘러 들어온 중국 국민당 군인들은 이곳에 정착해 윈난성의 차 향기를 뿌려 놓았다. 이방인들의 슬픔과 정착의 역사가 쌓여서일까. 빠이는 그 누구라도 품어주는 기묘한 포용력이 있다.
이 '고립된 낙원'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1980년대의 서양 배낭여행자들이었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이곳은 자유를 갈망하던 히피들의 성지가 되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몇 달이고 머물게 된다 하여 '여행자의 블랙홀'이라고도 불렸던 빠이. 그들이 남긴 예술적 감성과 방랑의 정신은 여전히 카페와 라이브 바에서 흐르고 있다.
빠이는 내게 자유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곳이다. 자율성과 주체성을 찾아 갈망하던 그 시기, 빠이는 나에게 항상 ‘그래도 좋다.’는 대답을 해줬다.
치앙마이에서 762개의 커브를 지나야만 도착할 수 있는 빠이, 멀미 안 하기는 쉽지 않아서 중간에 카페에서 쉬어가는 것은 필수다.
바이크로 오는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치앙마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Pai Country Hut
빠이에 도착하여 처음 묵은 숙소였다. 정보확인을 위해 검색해 보니 아직도 영업 중이고, 주변에 숙박업체가 더 생긴 듯하다. 1박에 5만 원 정도 아직 저렴하게 유지되고 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빠이에서 제일 처음 느낀 감정도 처음 이곳을 찾은 서양 여행자들처럼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어떤 것도 해볼 수 있는 자유’였다.
빠이를 한 장의 사진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첫 번째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자연소재로 군더더기 없이 자연의 키에 맞게 지어진 오두막, 옐로우와 그린 사이의 컬러가 주는 평안. 빠이의 매력을 모두 담고 있다.
숙박은 다른 부대시설이 없어도 완벽했다. 모두들 해먹에 누워 책을 읽거나 아침에는 맨발로 요가를 한다.
나는 한가할 때 OTT를 즐기는 편이다. 물리적으로 한가할 때가 아니라 심적으로 한가할 때… 그래서 한국에서는 미디어를 거의 못 본다. 이 시기도 내가 태국에 없었다면 ‘응답하라 1988’은 못 봤겠지.
내가 시간을 내어 투자하지 못한다는 건 내게 그보다 더 이로운 게 있기 때문이다. (이롭지 않다는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들여서 하는 노동과 그 의지를 높이 사는 편이다.
Big’s Little Cafe (폐업)
트립어드바이저 기준 제일 평점이 높았던 곳인데 지금은 폐업을 했다. 아침에만 영업을 하는 breakfast 집. 빠이에는 아침 파는 곳이 많다. 단골들이 많은지 사장과 손님들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빠이는 서양 배낭여행객에 의해 발견된 곳이라 그런지 메뉴도 거의 아메리칸 브랙퍼스트.
아래 사진은 Big’s Little Cafe 옆에 있던 또 다른 카페다. 이제는 혈당 이슈로 아침부터 과일주스는 마시지 않겠지만 태국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망고주스 아닌가.
빠이는 아침 일찍 여는 카페가 많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에 빠이의 아침은 생기 가득이다. 도시의 분주한 아침 모습이 아니라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능동적으로 시작하는 모습. 그 모습은 내가 바랬던 가장 이상적인 아침의 모습이었다. 빠이에서의 아침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능동적으로 시작하는 아침을 포기하기 못하고 있다. (내게 취직은 너무 어려운 것… T_T)
Maya Burger Queeen (마야 버거퀸)
정크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 피자, 치킨 등은 정말 안 좋아했다. 지금은 수제버거가 잘 나와서 종종 사 먹지만, 2016년만 해도 누가 먹으라고 사줘서 먹어야만 하는 햄버거 아니면 잘 먹질 않았는데, 빠이에서는 그 통념마저 사라졌다. 메뉴에 있는 햄버거는 거의 다 먹어보려 했었으니…
햄버거, 피자, 치킨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건 나쁜 음식이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햄버거, 피자, 치킨은 뚱뚱한 미국인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빠이에서는 그 조차도 ‘어쩌라고? 내가 좋다는데!’가 되더라.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보게 해 줘서 빠이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 또 나의 금기 음식이었던 피자도 즐겁게 먹었다.
Om Garden Cafe (가장 좋아했던 카페!)
여행을 하면 건강해지는 이유는 식단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로컬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경험을 높이 산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그 지역의 기후에 잘 맞는 식재료 베이스의 식당을 찾거나 그 식재료를 구입해 해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에서만, 그때만 할 수 있는 경험. 그 자체가 내겐 여행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여행에서 배운 그 마음가짐을 일상에 적용하려는 의지를 담아 한국에 돌아오는데, 그것이 나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Art In Chai
빠이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곳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만석이다. 낮에는 책과 노트를 든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저녁에는 기타를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랩탑보다 책과 노트를 든 사람들이 많았던 모습이 내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게 예술이지.
성스러운 노동의 현장, 이곳에서도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흐른다.
미니쿠퍼 퍼레이드
작은 마을이지만 미니쿠퍼의 정기 모임이 열린 듯하다. 자동차라는 게 잘 안 어울리는 마을이지만 빠이의 미니는 꽤 용서해 줄 만하다. 좁은 흙길을 따라 열리는 카 퍼레이드.
빈티지 미니부터 포인트 컬러 미니까지 귀엽다.
빠이에서 만난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친구
빠이는 선택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도시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그들만의 흥과 문화가 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빠이를 찾는지 궁금하지만 알 것도 같아서 묻지 않았다. 카오산로드도 외국인이 많이 찾는 거리지만 빠이와는 또 다르다.
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미국인 친구가 앞에 와 앉았다. 그 친구도 혼자 왔단다. 아시아는 처음이라며 내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미얀마 바간의 열기구 사진이었다. 사원 위로 열기구들이 떠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면서 이걸 보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시아에 왔고, 미얀마로 건너가기 전에 빠이에 잠시 들렀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테크회사에서 일하는 개발자라고 했다. 당시 기준으로 2년 전에 샌프란을 가본 적이 있어서 반갑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샌프란 하면 날씨 칭찬이 먼저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샌프란에 왜 실리콘밸리가 생긴 줄 알아?”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당연히 정부지원이나 학교가 많아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꽤 낭만적이었다.
“날씨가 365일 좋아서야. 365일 생각하고 연구하고 공부하기 좋은 날씨거든.”
날씨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다양성 관점에서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우리나라 날씨가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샌프란의 날씨가 부러웠다. 우리의 봄가을 날씨가 일 년 내내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친구의 대답에 수긍이 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봄가을은 샌프란의 봄가을과는 좀 다르다. 샌프란 사람들에게 봄가을 날씨는 일상이지만, 우리에게는 극한을 견딘 후 찾아오는 보상 같은 것이다. 혹독한 더위와 추위를 겪고 나서야 맞이하는 봄가을이기에, 이 계절을 놓치지 않으려 야외 활동을 즐기기에 바쁘다. 반대로 여름과 겨울에는 실내에 들어가 각자의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낸다. 이런 자연환경 차이도 분명 나라별 사람들의 성향에 영향을 끼칠테니.
풍등 띄우기
하루는 풍등을 띄우기로 한 저녁이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저녁을 먹고 풍등을 띄우기로 했다.
이 작은 마을에도 줄 서서 먹는 식당(Na’s Kitchen)이 있는데, 그날따라 유독 그 식당에 눈에 들어왔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줄 서는 식당이라 궁금하긴 했었다. 줄 서서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날은 줄을 설 용기를 낼 기분이 들었다. 금방 줄어들 거란 생각에 줄을 섰는데 1시간 반을 기다렸다. 자리에 앉아서도 음식이 꽤 늦게 나왔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풍등을 띄우고 일찍 자려는 계획이 처참히 무산되어 버렸다.
배고픈데 음식 기다리느라 지친 탓도 있고, 풍등을 띄우고 좀 일찍 쉬려 한 계획이 미뤄지니 살짝 짜증이 나려고 했다. 하지만 배를 채우고 지친 몸을 이끌고 풍등을 날리러 갔다.
풍등에 불을 붙이고 하늘로 천천히 띄워 올렸다. 그런데 주황색 불을 품은 풍등이 하늘 높이 올라 점점 멀어지는 순간,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내 풍등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별똥별 하나가 슉 떨어진 것이다.
계획대로 일찍 쉬었다면 놓쳤을 별똥별.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도 이렇게 완벽한 순간을 위해 시간을 밀고 당기며 조율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내게 이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나는 오늘 굳이 그 식당을 선택했던 게 아닐까. 여행은 내게 항상 큰 가르침을 준다.
Pai Walking Street
빠이의 저녁은 워킹스트릿으로 채워진다. 특별한 기대 없이 나가서였을까. 꽤 정성스럽게 진열된 음식들에 예상밖의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빠이 대부분의 음식은 식재료가 풍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선한 채소는 아낌없이 크고 넉넉하게 쌓여 있고, 채소 향도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들을 아낌없이 쓰는 느낌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들. 그것도 빠이 워킹스트릿의 매력이었다.
Hair Wrap
해외에 나가면 꼭 하고 오는 것 중 하나이다. 잘 못 씻고 머리를 질끈 묶어도 꾸민 듯 안 꾸민 듯 나름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한국에선 바로 시선을 끈다. 그래도 내겐 이것만큼 만족스러운 기념품은 또 없었다.
내게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는 여행은,
내가 온전히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들로 가득 채워진 여행이다.
빠이는 내게
자유함을 허락했다.
빠이는 내게
뭘 해도 뭘 안 해도
그대로 넌 충분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