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의 철학

인생을 채우는 ‘여행과 일상’을 대하는 자세

by 자민
여행,
아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다.
하필 글자에 ㅇ(이응)이 많아 비음이라
더 감정만 남고 구름처럼 흩어지는 것 같다.



여행의 의미는 각자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여행은 깨끗한 거울이다.


내가 20대에 여행에 집착했던 이유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회가 안겨준 수식어 말고 나를 표현할 나만의 단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껍데기 인간 같았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나를 규정하는 모든 맥락에서 벗어나야 했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습관적으로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는 달랐다. 아무도 내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나는 순수하게 내 선택만으로 내 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낯선 환경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도구였던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예상치 못한 모든 순간들에 나는 어떤 선택들을 할 것인가, 내가 마주하는 감정들은 어떠한 것인가.

그 작은 순간들은 나를 드러내느라 열심이었다.



내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순간에
우리는 인생을 찬란하다고 묘사한다.
빛날 찬(燦), 빛날 란(爛)
빛나고 또 빛나는 그 순간 말이다.



낯선 환경에서 나의 감정은 나침반이 되었다.

감정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 발걸음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미묘한 감정들이 분명히 있었다.

어떤 골목길 앞에서 내 시선이 머무는 곳, 특정 카페 앞을 지나칠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끌림.

Gut-feeling, 생각 이전의 직감을 따라가는 여정을 나는 좋아한다.


그 직감이 틀린 적은 없냐고?

애초에 인과론적 사고방식에서 직감은 맞을 수가 없다. 원래 인생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길로 가든, 그 자체로 온전함이다. 이원론적 사고가 옳고 그름을 만들어낸 것일 뿐.



평소에도 직감을 따르려 하지만 한국에 있으면 그 수신기가 흐려질 때가 있다.

해야 할 일, 해야 한다고들 하는 일, 여러 이야기에 노출되다 보면 내 목소리를 들을 공간이 사라진다. 타인의 기대, 사회적 시선, 불문율들. 그 소음 속에서 내 내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사람의 입에서 듣고 있으면, 그게 곧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착각을 쉽게 하게 된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쪽을 봐야 할 것 같은 것. 그것이 세상의 길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물리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간절했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으면 고정되어 있던 나의 에너지가 해산되고 재배치된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원래의 에너지로 금방 돌아온다. 익숙한 관계들, 익숙한 역할들이 나를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반복되는 탈출은 결국 고정된 이 에너지를 조금씩 깨뜨렸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전과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똑같은 일상이 미세하게 다르게 느껴지고, 익숙했던 것들에서 낯선 면을 발견한다. 거울을 자주 닦아야 제대로 된 상을 비추듯이, 나는 여행을 통해 나를 비추는 거울을 닦아왔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조금 더 선명한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행은
삶의 pause 버튼 같은 것이다.
주변이 갑자기 멈추어버리는.

내 시간도 멈춘 거 같지만,
사실 그 순간은
영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찰나다.

여행, 나그네 (旅), 다닐 (行)


세상이 나를 지배할 수 없도록

에너지장에서 빠져나오는 무모함,


자체 발전기를 돌릴 수 있도록

나만의 에너지원을 찾아 나선 무모함.


나그네의 행로에 불과했던

무모했던 나의 20대.


결국,

나그네의 무모했던 발자국이

내 인생의 밑바탕이 된다.




일상

나만의 공화국을 완성한 후로는 예전만큼 여행을 가지 않는다. 2주 이하로는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20대와는 달리 2주 이상 여행하면 오히려 에너지가 흩어진다. 나는 이제 일상에서도 내 재료를 찾을 수 있다.


여행지에서의 단순 감상문이 아닌 성장에세이를 연재하려고 한다. ‘여행과 일상’은 진행형의 생명력 있는 브런치북이 될 것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