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China, 2006-2013
비밀번호 찾는 질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는?”이란 질문이 있는데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는 상해였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는 것은 객관적으로 아름답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숭고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든 상관없이, 정작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는 건 나를 변화시킨 것 혹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 것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한마디가, 나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꾼 문장이 될 수 있듯이, 세상이 걸작이라 부르는 것도 내 안에 아무런 감동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내 기억에 쉽게 남지 않는다.
꼭 좋은 기억이라고 오래 남는 것도 아니고, 나쁜 기억이라고 쉽게 잊혀지는 것도 아니다. 행복했던 순간도 내 안에 아무런 변화를 남기지 못했다면 그 순간은 금방 희미해지고, 반면 고통스러웠던 경험이라도 그것이 나를 다르게 만들었다면 오히려 선명하게 살아남는다. 그래서 나는 기억은 화학적 변화의 증명이라고 설명한다.
화학적 변화는 물성 마저 변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기억을 추억이라 부른다. 추억은 단순히 오래된 기억이 아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들만이 추억이 된다. 건너기 전의 나와 건넌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기에, 그 강 너머의 시간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 된다.
추억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정은 아득하다.
아득함은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각이 아니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한계적 사실이 만들어낸 가상의 감정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감정은 가장 왜곡되기 쉽다. 감각은 현실에 닿아 있지만, 생각으로 만들어진 감정은 현실과 무관하게 스스로 부풀고 깊어질 수 있다. 그래서 추억은 때로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혹은 더 고통스럽게 기억된다.
그런데 그 추억의 중앙에는 ‘관계’가 있다. 내가 마음을 많이 쏟았던 존재와 그때의 서사를 완성하게 되는데, 우리는 아득한 감정이 그 대상에게로 향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추억이 종종 왜곡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렇게 왜곡된 추억이 지금의 나를 움직인다. 결국 가장 실재하지 않는 감정이, 가장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추억 속의 대상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이다. 시선을 타인이 아닌 나의 변화와 발전으로 돌릴 때, 어떤 경험도 낭비가 되지 않는다. 아픈 기억도, 부끄러운 순간도, 그것이 나를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었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보물이 있다.
깊이 새겨진 것들, engrave된 것들은 자연의 물성을 닮아있다.
engrave된 금속은 표면이 아무리 변해도 새겨진 형태는 사라지지 않는다. 녹이 슬고 빛이 바래도, 홈은 그 자리에 남는다. 인생도 그렇다. 나를 흔들었던 경험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희미해지지 않는다. 세월이 쌓일수록 표면은 변할지 몰라도, 깊이 새겨진 것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남는다.
나무는 상처를 지우지 않는다. 깊이 패인 자리도, 나무는 그것을 없애는 대신 자신의 성장 안으로 천천히 흡수한다. 몇 년이 지나면 그 상처는 나이테의 일부가 되어 나무 그 자체가 된다.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안으로 스며들어, 결국 나를 이루는 결이 된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조각은 이미 돌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냈을 뿐이다.” 그는 돌을 무언가로 만들려 한 게 아니라, 돌 안에 이미 있던 것을 드러냈다고 했다. 조각가의 끌은 창조하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인생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 모른다. 경험이 나를 깎아내고,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원래 있던 형태가 드러나는 것. engrave된 것들은 그 형태를 만드는 결정적인 끌 자국으로 남는다.
상해는 내게 아득한 곳이다.
그래서 나는 상해를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고향이란 단순히 오래 머문 곳이 아니다. 내가 가장 날것의 모습이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준 곳, 그리고 나와 함께 변해간 곳이다.
스무살, 자아정체성이 막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에 내게 가장 절실했던 모든 것은 상해에 있었다. 롱디를 하고 있어서 상해를 가게 된거지만, 나를 부른 건 애인이 아니라 상해였다. 상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감정을 그대로 수용해주는 도시였다. 그리고 그 시절의 상해 또한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은 와이탄이었지만, 큰 빌딩이 1년에 하나씩 들어서고 있었다. 격변하는 건 내 인생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꽤 위로와 응원이 되었고, 그렇게 발전하는 상해를 보러가는 설렘도 있었다. 격변하는 건 내 인생뿐이 아니었고, 상해도 나와 함께 성장했다. 그렇게 상해를 찾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듯 함께 발전하고 있었다. 내가 한 뼘 자랄 때 도시도 한 층 높아졌고, 도시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때 나도 새로운 나를 만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는 사이였다.
2010년에, 나는 서울을 벗어나 상해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엑스포가 열리던 해라 엑스포에서 일을 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채용은 끝난 상태였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내가 무슨 수로?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상해 엑스포에서 인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유학생들이 방학에 한국으로 떠나며 단기로 내어준 집을 빌렸는데, 같은 집 친구 중 둘이 엑스포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집안 사정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그 자리를 급하게 채워야 했다. 중국어도 변변치 않은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간 건 거의 정말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면 어떻게든 열린다는 믿음이 생겼다.
중국어를 잘 하진 못했지만, 행사장에서 해야 할 말은 어차피 정해져 있으니 대사만 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대에 올라 직접 말을 해야 하는 역할도 있었다. 팀장은 나를 배려해 그 역할은 빼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해보겠다고 했다. 하루 만에 5분 분량의 대사를 모두 외웠고, 무대에 섰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수 없이 끝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앞으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엑스포가 내 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자신감을 채우기 위한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인생을 계획해서 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항상 길이 열렸다. 대단한 길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동기를 주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었다. 그 일들은 커리어가 쌓이지 않는 일이다 보니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느낌은 중요하지 않았다.
엑스포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창업을 했다. 방한 중국 관광객을 위한 온라인 매거진이었다. 맛집, 패션, 뷰티, 건강 — 네 가지 카테고리로 한국을 소개하는 콘텐츠였다. 서울패션위크가 막 시작되던 때였고, 중국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던 시점이었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현금 흐름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1년 반 만에 접었다.
그때 인연이 된 디자이너, 모델, 브랜드 대표들 덕분에 간간이 에이전시 일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배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에 대해 돈을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연결만 해주는데 돈을 왜 받지?’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이다. 에이전시라는 일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사람들이 나를 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느낌만 쌓였고, 내 안에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는 공허함이 커졌다.
친구들은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라고 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그러기 위해 억지로 일찍 잠드는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주말을 기다리고 월요일을 두려워하는 인생을, 방학도 없이 수십 년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친구들 눈에 나는 현실감 없고 철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응원보다는 위로에 가까운 말들이 돌아왔고, 나는 그 온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있을 거라고. 10년만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떤 이름으로도 정의하려 하지 말고, 이끌리는 대로 따라가 보자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