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윤 Apr 03. 2023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 산책

휴직 5주 차 기록




남편은 직업 특성상 1월부터 3월까지 바쁘다. 3월 말까지 빡센 업무를 다 끝내고 4월 1일이 되면 그때부터 다 모르겠고 쉬고 싶은 상태가 된다. 겨울 내내 남편과 함께하는 봄만 기다리고 사는 나와는 달리, 힘든 일이 끝났으니 그저 쉬고 싶은 남편 (그 당시 남친) 과의 입장 차이로 연애 초반엔 서로 서운하기도 했었다. 일 년 내내 기다렸다가 일주일만 활짝 피는 벚꽃. 매년 그 해 벚꽃은 지금이 아니면 못 본다는 생각에 더 집착했고, 남들처럼 어디로든 가야 했다.


예년보다 따뜻해진 날씨 덕에 올해 벚꽃은 일찍 폈다. 4월에 여의도로 벚꽃놀이를 가자고 남편과 약속은 했지만, 이미 혼자 걷는 길 곳곳에 벚꽃이 한창이었다. 팝콘 무더기 같은 꽃나무 사이로 빛이 새 들어왔고, 빨리 피운 꽃들은 바람에 후드득 떨어지기도 했다. 다들 평소보다 걷는 속도를 늦추고 핸드폰을 눈 위로 들어 카메라에 봄을 담고 있었다. 나도 귀에 꽂은 에어팟을 제자리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따뜻한 이 시간이 주어져서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대학교 때 학생리포터를 했던 나는 기획기사로 캠퍼스의 봄을 취재하게 되었는데, 그때 손잡고 내 앞을 걷는 커플들을 저주했었다. 스물일곱 봄엔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입고 바람에 회오리치는 벚꽃 잎을 정통으로 맞으며 엉엉 울었었다. 서른 살엔 살 빼겠다고 매일 한 시간씩 온천천을 걸었는데 그때 밤 벚꽃은 지금도 생생하다. 서른한 살, 남편을 만난 이후론 내 인생이 그토록 바라던 평범 궤도로 진입했다. 주말엔 남편과의 벚꽃데이트 일정을 달력에 써 두었고, 평일엔 회사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들고 회사 주변을 산책하면서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나름의 일 문제, 사람 문제로 고민해 왔지만 그래도 늘 즐거웠다.


볕이 쏟아지는 평일 낮, 여유롭게 혼자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벚꽃과 함께했던 여러 감정들과 사람들이 생각났다. 봄은 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오지만, 그 속의 나는 늘 달라지고 있었다. 게는 취향부터 크게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달라짐에 우열이 있겠냐만은, 그때의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내린 답으로 살았으니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활짝 핀 벚꽃처럼 내 인생도 얼른 아무 걱정 없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다가도, 지금이 그 순간 이거나 이미 다 지나갔으면 어쩌지- 하고 다시 마음속 불안이 일어난다. 나의 연약함은 올봄에도 어김없이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불안이 일어나는 순간을 인지하고, 멈춤이 필요함도 인지한다.


점점 더 나아지는 봄이다. 올해 벚꽃은 본전 생각도 안 날 만큼 실컷 봐야지.


이전 04화 제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