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날카로운 통증들이 몸 한 바퀴를 돌고, 돌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이곳저곳을 찌르는 통증들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고 덕분에 체력은 그 어느 때보다 미미했다. 기억을 잊는 일에 취약한 나는 안 좋은 기억을 꽤 오래 기억했는데, 그것이 통증의 원인이라면 원인일까. 그렇다고 이렇게나 꽝꽝 아플 일인가. 몸이 아프니 쉬이 지치고, 지친 마음에 더 마룻바닥에 착 하고 가라앉는 미미한 미물. 어느 날엔 펀딩 제작한 다이어리 정산액을 계산하다가 수수료와 부가세 앞에서 숫자에 마저 미미한 나를 발견했다. 이뿐인가, 오며가며 웃고 지나갈 말들도 늘 가슴에 아로새기는 나는, 미미.
그러다 읽기 시작한 <메리에게 루이스가>의 저자, C.S. 루이스를 만났다.
감정과 느낌만 넘치던 20대 때 접한, 뼈 때리는 기독교 저자라고만 생각했는데 훗날 알았다. 그가 워낙 저명한 작가였다는걸. 그리고 요즘, 그가 삶의 괴리 속에서 몸부림치며 글을 쓴 것 같아 위로가 되는 거다. 특별히 이 책은 나처럼 쉬이 지치는 상대에게 쓴 편지글이라, 마치 내가 수신인이 된 듯 작가에게 거듭 고마워하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마침, 메리는 내 첫 영어 이름이다).
저자는 50미터쯤 걸으면 아파오는 왼쪽 무릎의 호소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고, 귓속 신경통을 흔한 외풍 정도라고 여기며 벗 삼는 사람이며, 불면증은 되도록 잠에 무신경할수록 낫는 법이라고 일러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보통은 힘이 들 때 자신이 변하면 된다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은 스스로 변하기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내면에 고장난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가끔 메리가 만난 무례한 사람들에 대해 청량음료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는데, 가령, "상처받기 전 기억해야 할 건, 사람들은 꽤 의도가 없다"라며 누구나 알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은 확언받고 싶은 문장들을 100년도 전에 태어난 할아버지가 읊어주니 꽤 힘이 난다.
알다시피 루이스는 고통과 기쁨에 대한 글뿐 아니라 많은 동화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러면서 신의 영역을 알아가고자 애쓴 작가다. 그의 인간 본연으로서의 고민들이 글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렸다. 저자가 편지를 쓰던 1950년대의 영국의 한 교수실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그가 살던 정원 있는 집과 우편함에 터질듯 꽉 찬 편지들을 상상하며. 그가 휴가를 떠난 북아일랜드의 소도시도, 그가 일러주는 작가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간만에 아주 능동적으로 책을 읽으며. 다시 나의 미미함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내 존재가 땅에 떨어진 찌그러진 캔이 아니라, 재활용 봉투 속 캔 정도는 되지 않나. 재생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미미함을 밀고 나가면 언젠가 어디에는 가닿아 있지 않을까. 먼훗날 할머니가 되어 나와 닮은 미미한 친구들과 손잡고 어느 공원을 걸을 상상을 한다. 글을 쓰며 치료를 받으며 이래저래 나아질 기미가 조금은 보이는 미미가 된 지금, 혹시 나처럼 회복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말을 건넨다.
미미, 미미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