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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May 03. 2024

맛, 2

생각편의점

6699

맛, 2



이 생각을 편의점에 들여놓기 전에,

섹스란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은데

쓴다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인간이 동물이란 건

웬만한 이는 다 아는 건데,

섹스의 순우리말을 찾다 보니

상응하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흘레'는 인간을 빼놓고

동물들의 성교를 의미한다고 하고

'씹'과 같은 우리말은 모두

욕으로 알고 있으니

달리 쓸 만한 단어가 없더군요


나는 섹스를 '흘레'로 대체하고,

교미(交尾)나 교접(交接)이 아닌,

맛을 나눈다는 의미로

교미(交味)라는 한자로 쓰고 싶지만-

이런 말이면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의 유머를 담아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될지 모르기에  섹스를 그냥 씁니다






'내 생각'을 규명할 이유가 없는 것은

내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칸트라도 이성을 비판하는

지적 유희에 취해

자신의 어금니가 썩어가는 고통을

쾌락으로 즐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하자면, 이성비판은

그의 이가 아무런 말썽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쓰인 것일 수도 있는 거지요

그렇게 보면,

이도 썩지 않고, 배도 불렀기에

그가 순수이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린유탕은

삶의 재미를 알던 사람으로,

쓸려고 찾으면 보이지 않는

개똥 같은 철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아픈 이에 얼음주머니를 받친 채

의사를 찾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소회를 말했을 겁니다


"이가 철학을 이겼던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 치통이 사라졌으니

철학이나 할까?"


일상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수많은 추상적 개념을 섞어

'생각'을 앓던 칸트에 비해

'삶'을 즐겼던 린유탕,

그래서 그를 좋아합니다


인간을 말하지 않는 철학적 사유는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듣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철학이건 사랑이건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단순하다고 하는데,

현실을 훌쩍 넘어서는 생각은

오래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캐러비안의 해적'보다 '나의 아저씨'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맛은 개인의 취향이니까

거부감이 없기를 바라며,


모델이나 연예인들이

흔히 카메라 앞에서

요구받거나, 스스로 보여주는

포즈, 모습에는 무심한 편입니다

오히려 그 작위적인 표정 등에서

카메라 뒤에서의 평범성을 봅니다


생체 나이 탓으로 리비도가

충분하지 않은 건가 싶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막말로 말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혹은

또 다른 어떤 성이든,

아무리 고혹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간이라도  

벗으면 비슷하다는 걸 압니다

우리가 흔히,

화면이나 스크린과 같은

프레임 속에서만 보던 인물을

실제 거리에서 볼 때 알게 되

그 인물의 평범성, 서먹함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남들이 가진 것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들이

적당한 위치에 달린 일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좀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한다면,

그렇게 보는 나, 개인의 취향입니다






우리가 섹스를 하고,

뭔가, 서로에게 순수해진

자신을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울 겁니다


자위로는 얻을 수 없지만

섹스가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유쾌한 것은

'너'에게 더 이상 감출 게 없어진

달콤한 해방감입니다


(순수와 해방감을 못 느끼면

섹스를 섹스로 하지 않거나,

그런 상대와 섹스를 한 겁니다)


해방감이 없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섹스보다 효율적인 자위로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위가 허탈감을 느끼게 할 때

섹스는 해방감을 줍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AV 연기자들의 그것은 차치하고,

요즘 생판 남 앞에서

자신의 자지를 보인다든지,

나아가 자위를 하는 그런

사건이 보도되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의 근저에는

나 아닌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

해방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평범한 우리가,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것도

자위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해방감을 섹스가 주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에게

이 해방감은 중요합니다

윤리와 사회규범, 도덕과 상식에서,

또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도

별 다른 죄책감 없이 드러내는,

인간만이 느끼는 것일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쓰고 있는 욕설에,

성과 관련된 것이 많은 이유이기도 한데,

여타 동물이 삶의 일부로서

섹스를 '절차'로 본다면,

우리는 문명화와 함께 섹스를 

'사회적인 합의의 문제'로 만들어

외설이나 변태가 규정되는 바람에

해방감을 느끼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보이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한다는 느낌뿐인가 싶지만

누가 먼저 절정에 이르는가의

순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절정 자체에 이를 때의

나의 순수한 동물성을,

평소의 내가 아닌 나를

너에게 보여주는 것,

헤방감은 거기에서 온다 싶습니다


나를 해방하고

너를 해방시켜 주는 것,

인간 사회에서 적나라한 나를

너에게 내던지

이 해방감을 놓치지 않으려면

고상하든, 아니든

섹스는 있는 그대로 두고, 그것을

김치를 익히듯 감출수록, 그리고

부끄러울수록 맛이 좋아질 겁니다






하다 못해, 이별을 기념하기 위해

마지막 섹스를 한다는 것이나,

영리한 이에게는 그게 선물이고

누군가에게는 섹스가

삶의 밑천도 되는 걸 보면,

섹스를 해야 할 '꺼리'를 찾는 게

우리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폴 블룸(Paul Bloom)의 분석이 아니라도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고,

그 의미가 타인의 눈에 보잘것없어도

그것으로 '나'를 자랑하려는 동물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짓 까부는

허접한 인연이었다 해도

사랑해서 하는 섹스가 그러지 않은 경우보다

고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이지요

그러나 맛있는 섹스가 있는 한,

실제 고상한 섹스는 없을 겁니다


사랑에 빠지면 맛있는 섹스를 알게 될 겁니다

과학적 근거불명하나 조사에 따르면

사랑에 빠져 해방감을 느낄 때, 우리의 뇌는

마약 필로폰의 자극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도파민을 분비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자극에 중독성이 없어

즐길 만큼 즐겨도 해가 될 일이 없습니다

 





누드화 전시회에 간 나는

그 그림으로 작가가

어떤 모델을 그렸나에 대해서는

크게 호기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화가의 붓질좋은가,

아닌가를 눈여겨볼 뿐입니다


그리고, 누드화를 감상할 때는

겨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누드화와 달리

감출 수 있는 모두 감춘 채

그 누드화를 감상하고 있는,

바로 옆에 선 사람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린 뒤의 혹한이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상당하는 이로서는

너무 노골적이고 음탕한

시선일 것 같다고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겁니다


"인간의 머리에 음탕한 생각이

한 구석 차지한 걸 부정할 건 없겠지만,

그게 나쁘다고 비난하는 거라면

내 맑은 눈에서 음탕을 보는

당신의 눈이 쓸데없이 음탕한 거겠지."





※글자로 읽는 자지와 보지란 말에 거부감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두 단어는 국림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한자말, 음경(陰莖)과 음부(陰部)를 이르는 비속어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음경이나 음부가 격조와 품격을 가진 말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비속'이란 무엇이냐. 격이 낮고 속되거나 그런 풍속이라고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명화 덕분에 수치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한자로 된 말에 품격이 높다는 개념은 놔두고,

개인적으로는 우리에게 '격이 낮고 속된' 것을  

옷 속에 감춘 채 평생 그걸

부끄러워하며 살라고 우기는 듯한

우리 한글 교육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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