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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뉘 Dec 15. 2023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생각편의점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까워도,

심리적으로 먼 사이를

우리는 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

무관심해지거나 

싫어질 수 있는 것 가운데

으뜸이 인간이어서 

살갗을 비비고 살아도

그는 남일 수 있으며,

남보다 못한 경우가

생각보다 흔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내가 그대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다시 말해,

남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남이기 때문입니다




요람에 누운 아기가

눈을 맞춘 이에게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처럼

두뇌를 빌린 것보다

관능에 따른 사랑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관능이라 하면, 먼저

퇴폐적 성욕과 연결해 놓은

우리의 위선 때문이거나

언어학자 덕분일 텐데,

요즘은 그렇게 말하면

야만적이라는 비난을 받겠지요


인문과학의 발전 덕분에 

감정을 단어로 배우고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입으로는 사랑을 담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기는

더욱 어려워진 듯합니다


"쟤가 왜 저래?"


드라마나 책 속에만 있는 

고리타분한 감정으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없다고

자신을 구속하는 것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을 기만하는 것 사이에

어느 쪽이 좋은가 하면,

그나마 후자일 겁니다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갑질을 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 나는 

누구든 죽일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잠시만 숨길을 막으면 되는

살인 같은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자신을 가두면, 

쓸데없이, 내가 정말

그걸 할 수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는 

패배적 생각을 넘어,

'삶에 늦다는 건 없다'는
말을 되새기면

살아있는 이는 오로지 현재로 

판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그대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이유이고,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는 나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이유입니다


그대는 내게 무엇인지 모르고,

나도 그대에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미래에 무엇으로 기억될지

미래의 과거를 가져본 적 없이,

그저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요





그대의 사랑스러움이나

사랑스럽지 않음을 느낀 건

나 자신일 테고, 

그 모든 건 그렇게 느낀

내 책임입니다


사랑스러운 그대를

느끼는 것에서 멈춥니다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있을 텐데, 그때도

그대로 멈춥니다


그저 순간을 본 것으로,

어느 순간이든 그대를 

다 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알다시피, 무엇이든 쫓는 자가 

쫓기는 자보다 행복합니다

쫓기는 자는 순간순간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한 길로 들어가는 동시에

제대로 된 길인지를 판단하고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만, 쫓는 자는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대개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목표를 가진 이가 가는 길이

좀 더 유리하고 유쾌합니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것이 훨씬

달콤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누가 나를 사랑해 줄지

한정 지을 수 없기에

타인의 감정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초라함과

치사스러운 자신을 볼 겁니다

사랑하는 데는 

나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지요


그런 그대가 

사랑에 무심하게 될 때

데카르트의 말이 맞다면,

삶의 어느 시절을 지나고 있든

그대는 죽은 겁니다


생존 증명은, 하다 못해

그대가 신고 다니는 

구두코를 사랑한다는 

눈빛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 눈빛을 받고 싶어 할 그가

한둘은 있을 테니 말이지요

그대가 '사랑하려는' 얼굴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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