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 날짜가 나왔다. 12월 14일! 정확히 3주 뒤이다. 지난번 레슨은 정말 재밌었다. 연주도 잘 되었고, 음악에 대해 하나하나 새롭게 배우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그동안 레슨을 받으면서, 선생님께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그건 바로,
"너무 말을 잘 들으시네~"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칭찬이 아니다. 좀 더 내 느낌대로 나아가야 하는 부분인데, 악보에 나와있는 대로 곧이곧대로 딱 그 정도로만 했을 때 들었던 말들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좀 놀랐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나는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약대 재학 시절 나는 모두가 시키는 것을 너무 잘 해내고, 말을 잘 듣는 환경이 답답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사실 그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약학은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학문이므로 엄중함과 성실함 등이 필수 자질로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부분이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이과생이자 약대생이었는지, 약대에선 듣지 못했던 말을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듣고 있는 것이다. 이과 공부와 악기 연주는 근본적으로 결이 많이 다르다. 이과 공부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좀 더 감정을 배제한 냉철함과 엄격함이 요구된다.
반면 악기 연주는 그 음악을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추상적이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그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나 음악에서 요구되는 감각은 단연 청각일 것이다. 정말 예민하게 소리를 잘 듣고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재미있다. 사실 정답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해 영역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의 분야가 내겐 잘 맞는다.
"이 부분은 박자 너무 딱딱 맞추지 말고, 약간의 텀을 주고 쳐보세요. 노래하는 부분이니까~"
내 악보!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낭만곡이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가능하다. 선생님이 말한 이 부분은 모두가 아는 빠른 부분이 지나가고 난 후 나오는, 중간의 느린 부분이었다. 악상이 "Moderato cantabile(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sotto voce(작은 소리로 -> 나지막이 소곤소곤, 또는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부분은 음악을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수학 공식처럼 그냥 건반을 타이밍에 맞춰 눌러대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게 듣고 또 연상되는 장면을 느끼고(선생님은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라면, 오른손 멜로디는 거기에 돌멩이가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셨다) 매 순간을 집중해서 온전히 몰입해야 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곧 내가 되는 경지가 되어야 했다. 오버 같지만 정말 그렇다. 그래야 음악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온전한 몰입의 경지에서 전율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박자에 너무 집중해 왔던 터라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칠 수는 없었다. 이내 감을 잡고 잘 해내긴 했지만. 그때 생각했다.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구나. 자신의 본성도 중요하지만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거야. 내가 아무리 창의적인 성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정반대의 환경에 오래 있으면 내 창의성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점점 무뎌져 갈 것이다. 그리고 엄격함, 규칙, 정답과 같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성을 좀 더 익숙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새삼 그런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나는 내가 새로운 시각과 접근, 그리고 다양성과 변화가 허용되는 곳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좀 더 나다움을 느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찾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것에 도전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