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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령 Sep 24. 2017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사랑하지 않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늦은 밤 과제를 얼추 끝내고서는 침대에 들어 누웠다. 눈만 감으면 잠들 것 같았지만 잠들기 전 항상 노래를 듣는 습관 때문에 이 날도 어김없이 핸드폰으로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반주가 나오기 무섭게 핸드폰 전화 진동이 울렸다. 늦은 시간에 내게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서는 받을까 말까 고민을 했다. 이 친구의 특성상 이 시간에 전화하는 것은 술주정이 분명했다. 그래도 친한 친구인지라 전화를 뿌리칠 수 없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자, 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그녀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여자답지 않게 눈물을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우는 것이 내 귓가에 들리자 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 단번에 직감했다. 그녀에게 진정하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도 그녀는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나의 잠도 달아나고 말았다. 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그녀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도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내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헤어졌어, 그런데 이유가 뭔 줄 알아? 내가 그냥 싫어졌다고 하더라, 날 사랑하지 않는데


그녀는 내 주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오랜 기간 동안 연애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헤어졌다는 말을 듣고서는 내가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위로를 한다 해도 그녀에게는 위로로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였던 사람과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서로 달랐지만 자주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또한 연인들에게 가장 순간이라고 불리는 군대도 두 사람은 슬기롭게 잘 이겨냈다. 힘든 시간을 다 이겨내고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두 사람에게는 6년이라는 연애기간을 이별이란 도장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내게 하소연을 했다. 난 계속해서 '아.. 어..'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늦은 새벽까지 그녀의 반복된 이야기만 들어줬다. 그녀와 통화를 끝내고서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왜 남자는 여자에게 사형선고와 같은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친구처럼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면 그 남자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일을 잊을무렵 한 모임에서 술이 입에 들어가자 자신의 연애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난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남성분이 이런 말을 했다.


연애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적당함을 유지하는 거야, 연애를 하면서 적당함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거든, 더욱이 오래된 연인이라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무뎌져서 적당함이 한순간에 깨지게 될지도 몰라, 그러다 보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권태를 더불어 혼란을 겪게 돼, 그러다가 나중에 이별을 선언해버리지, 그런데 막상 헤어지자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어, '미안해.. 우리 그만하자'라는 말은 여자에게 미련을 가지게 만들어 확실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사람은 '널 사랑하지 않아, 이유 같은 건 없어' 이 말을 하면서 확실히 정리해버려, 너희들 중에서도 지금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잘 생각해, 너의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어


말이 끝나게 무섭게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남자가 내 친구와 헤어진 이유가 저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다. 그렇게 모임이 끝나고서는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타고서는 이어폰을 귀에 꽃았다. 하필 내 귓가에 울리는 노래는 어반 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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