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아이의 동상이몽을 파헤치다
사춘기가 막 시작할 무렵, 그리고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책을 찾아 읽고 자료를 보다가 깨달았다. 어찌 되었건 이 모든 것을 쓰는 사람 또한 '어른'이라는 것을. (나 포함..) 그래서 어른이 없는 아이들만의 세계에서 지금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듣고 싶고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두루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카톡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10대가 아닌데 입장할 수 있었던 과정은 생략한다 ^^;) 그리고 지난 한 달간 나는 10대가 되어 오카방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를 해보았다. 매일 엄청난 양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주제도 다양했고 아이들의 특성도 다양했다.
하지만 어른이 없는 곳에는 무질서와 혼돈만 있고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우리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곳에는 아이들이 직접 운영하며 쌓아온 운영노하우와 규칙, 그리고 그것을 지켜나가는데 앞장서는 역할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질서 있게 대화가 오가고, 서툴지만 공감하며 방법을 서로 찾아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맞장구 쳐주며 나 또한 10대에 내가 했던 고민과 감정이 희미하게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꽤 한참 전부터 10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모여 고민을 나누는 어느 대규모 익명 오픈카톡방에서 소위 말하는 '눈팅'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오픈카톡방에도 함께 존재하게 되다 보니 마치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상태로 전혀 다른 공간을 동시에 관찰하는 특별한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메시지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아이의 세계에는 부모가 별로 없어요
가장 슬프면서 흥미로운 지점, 아이들이 가진 고민에서 <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작고 작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사춘기 부모들이 모여있는 방에서는 24시간 아이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가 나에게 오늘 했던 말과 행동, 아이의 학습과 생활태도 그리고 아이의 미래까지 부모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100%에 가까웠다. 당연히 부모가 아이를 생각하는 만큼 아이들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고, 아이는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상상 이상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의 대부분은 또래관계이다.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문제의 깊이는 각각 달랐지만 우리가 듣기에는 참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작은 세상이 아이들에게는 전부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이는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데, 삶에서 아이가 있었던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있는 부모들의 한 단면도 보게 되었다. 아이가 빠져나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여기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아이와 부모가 서로에게 바라는 경계선은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것 같다.
가장 큰 동상이몽은 <간섭>에 대한 정의
부모와 아이들의 대화 중,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다름 아닌 <간섭>이었다. "아이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간섭하지 말라면서 화를 내요" "간섭한다고 찢어진 눈으로 쳐다보면 억장이 무너져요" "알아서 잘하면 제가 왜 또 이야기하나요? 자기가 스스로 안 하니 제가 이러죠" "부모니까 이렇게 챙겨주는 건데, 철들면 알겠죠" 부모에게 있어 아이들이 말하는 '간섭'은 당연한 것이다. 사랑이고 관심이며 챙겨주는 일이다. 또한 아이가 알아서 잘하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과론적인 행동.
하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는 많이 달랐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이들은 간섭은 곧 나를 믿지 않는 것, 그러니까 사랑과 신뢰가 없기에 하는 행동이라고 인지한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이야기하면 너무 짜증 나요. 나를 못 믿는 거 아닌가요?" "내가 잘하면 말할 일이 없데요, 어차피 내가 잘할 거라고 믿는 것도 아니면서" "저는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또 같은 소리 하니까 진짜 너무 열받고.." 아이가 스스로 잘 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걱정을 담아 하게 되는 간섭과 잔소리가 아이 입장에서는 단순히 짜증 나고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은 얼마나 일상에서 나누는 사소한 대화가 아이와 우리의 관계를 서서히 벌어지게 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
적어도 10살부터는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들의 톡방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면 몇 살부터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 또한 인상적이었다. 부모들이 보통 중학생조차 철딱서니 없고 스스로 판단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아이들은 자신이 존중받아야 하는 연령을 적어도 10살부터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
초등학교 저학년 지나면, 우리 생각을 존중해야 줘야죠" (자고 있는 11살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놀랐던 점은 10살이라는 단순한 숫자에 있지 않았다.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인 10살 무렵부터 아이는 이미 '자신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기며' 독립에 대한 시동을 걸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부모와 아이의 동상이몽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다섯 살 때쯤, 남편이 아이에게 "아빠가 00 이를 언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줘야 할까?" 질문했었다. (아이는 인격체가 뭔지는 알았을까?) 그때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두 손을 활짝 펴며 열 살!이라고 대답했었지. 문득 생각나는 장면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는 <헤어질 결심>을
언제 하게 되는 걸까?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속상했던 부분은 고민 끝에 다른 아이가 "부모님께는 혹시 말해보셨어요?"라고 했을 때 대부분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는 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대답을 더 많이 했고,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부모님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을 주로 했다.
"부모님은 좀, 믿기 어려워요" "부모님에게 말하면 더 불안하게 해요" "말해줘도 어차피 잘 안 들어요" "말하고 나면 기분만 더 나빠요 도움도 안 되고.." 아이들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걸까? 친구에도 선생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을 '부모'에게 조차 말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문제해결을 배우고 어디에서 위로를 받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는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소년 아이들을 상담하던 시절, 부모에게 말 못 할 이야기는 언제나 등장으니까. 그리고 그나마 부모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는 상담에라도 빨리 올 수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을 찾는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이들이 처음부터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 결심'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이야기한 경험이 있다. 단지 그 초기경험이 썩 - 좋지 않았을 뿐. 우리에게는 사소하지만 아이에게는 꽤 심각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부모가 귀 기울여주지 않은 경험, 네가 더 잘하면 되지 라는 이야기를 들은 경험, 네가 잘못한 건 아니고?라는 비난 등의 경험이 아이로 하여금 부모가 나의 세계에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아이가 사춘기로 본격 진입하기 전 분명히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가 알 수 없는 아이의 세계가 생기고 그 안에서 첫 고민이 탄생하는 순간- 아이에게 어떤 존재로서 정의되느냐에 우리는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눈 감고 일어나면 아이가 저기 멀리 가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무수한 단계가 있었다는 것은 아이의 사춘기를 맞이해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참 좋은 소식이 아닐까싶다. 적어도 우리가 사춘기를 그저 '당하듯'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