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등등했던 코로나도 꼬리를 내리고 거의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인기있는 공연, 전시의 피케팅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개인적인 만남 뿐아니라 일적인 만남의 횟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런 모드전환이 반가우면서도 은근 부대끼는 것이 사실인데...그건 아마도 그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소소한 리추얼에 소홀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가 미친듯이 날뛰던 시절, 가끔씩 단조롭다 여겨졌던 일상이 더할 수 없이 단조로워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보다 더 일상에 몰두하고,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생겼다. 매일매일 습관 혹은 (편집증적인) 의식처럼 반복하던 루틴에 의미를 부여하니 ‘리추얼’, 혹은 삶의 우아한 리듬이 되었다. 이 우아한 리듬 덕에 조금 덜 흔들리며 그 시기를 버텨내었다. 나를 지켜주었던 그 리추얼, 흐트러지지 말고 다시 하나씩 반복하며 리듬을 맞춰야지.
아침 5시 55분에 울리는 핸드폰 알람을 끄고, 거실 오디오 알람이 켜지는 6시 5분까지 머리와 몸을 부팅시키며, 오늘 하루를 열어줄 첫번째 리듬을 떠올린다.
1. 눈을 떴으니, 체중계 앞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화장실에 다녀와서 체중계에 올라간다.
대개 체중계에 오르기 전 예상되는 숫자와 큰 오차 없는 숫자가 찍힌다. 어제 내 속을 채운 음식과 운동량을 훤히 알고 있으니 당연한 거지만. 지난밤 수면의 질도 고려해서 가늠해보는 체중은 상당히 정확하다. 이 정도 되니 매일 아침 체중계에 오르는 짓은 그만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어쩐지 내 아침 루틴의 리듬이 깨지는 것 같아서 몇 년째 지속하고 있다. g단위까지 정확하게 맞힐 때의 쾌감도 꽤 쏠쏠하니 말이다.
2. 보이차를 내리고, 짧은 아티클을 읽으며
오늘의 보이차를 고르는 사이, 미리 올려둔 전기주전자에서 자글자글 찻물 끓는 소리가 난다. 아침에 마실 만큼의 차를 우리고 난 후엔 하루 동안 마실 1리터의 차를 빠르게 우려낸다. 뜨거운 차를 호로록 호로록 두어 잔 연달아 마시고 나면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온몸의 근육이 야들야들해진다.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지는 이 짧은 순간의 느낌을 무척 사랑한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며 짧은 아티클도 하나 읽고, 하루 일정을 확인하고, 점심/저녁 칼로리를 배분해본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엔 점심은 샐러드로 먹겠다는 잘 지켜지지 않는 다짐을 종종 하기도 한다.
3. ‘세상의 모든 음악’과 함께 하는 퇴근길
가급적이면 퇴근시간이 6시와 8시 사이에 걸쳐지는 걸 좋아한다. KBS 클래식 FM에 주파수를 맞추고 해지는 도시 풍경을 담담하게 감상하며 핸들을 잡는다. 대개 빨간 브레이크등 불빛으로 가득한 도로지만 음악 덕분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하루 업무를 빠르게 복기해보고, 더 고민이 필요한 것들, 순차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길지 않은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다. 어차피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이런 저런 생각 사이를 떠다니게 되니 길게 생각을 이어갈 재간도 없다.
4. 불멍 대신 화초멍
소소한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본격적인 ‘멍’타임을 시작한다.
거실 창가에 놓인 반려식물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자리를 잡는다. 지그시, 멍하게 바라보다 보면 머리 속이 광활해진다. 한두 겹 정도 쌓였을 지도 모르는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시간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키우는 데는 꾸준한 관심과 수고로움이 동반된다. 기본적으로 햇빛, 적당한 양의 물, 환기 등이 필요한데,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관심이 늘 필요하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감추지 않고 받은 대로 화답한다. 매일매일 조금씩 다르게 해사한 얼굴로.
5. 거실 카페트 위에는 항상 공이 굴러 다니지
작정하지 않으면 하루 5천보를 채우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다 걷기 능력을 상실하진 않을까 겁이 나기도 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꼿꼿하게 잘 걸어 다니고 싶은 마음에, 허리와 발 건강에 집착하는 편이다. 거실 TV 앞에 매트를 펼친다. 카이로프랙터들이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했다고 풀어대는 스토리에 낚여 와디즈 펀딩으로 집에 들인 룹바냅을 허리춤에 깔고 눕는다. 허리와 골반을 Rolling한다. 이어서 젠링으로 교체, 약간의 고통을 느끼며 신전근도 가볍게 풀어주고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야무진 마사지볼을 꼼꼼하게 밟아준다. 내일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6. 한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책등들이 주는 영감 혹은 딴생각 불지피기
여유가 있는 저녁에는 서재로 흘러 들어가 2차 ‘멍타임’을 갖는다. 책장에는 완독한 책이 50% 남짓. 나머지는 몇 장 읽히다 다음 기회로 미뤄졌거나 영영 잊혀졌거나 혹은 예쁜 커버 디자인 덕에 앞으로도 계속 꽂혀 있을 책들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등을 감상하는 것 만으로도 뜬금없는 영감 혹은 딴생각이 뭉글뭉글 솟아난다. 기분이 동하면 한 권 꺼내 들고 내키는 만큼 읽는다. 이렇게 읽을 때 가장 잘 읽힌다.
7. 토요일 아침 스페셜 루틴
토요일 오전 10시 40분, 일주일 치 아침 식량을 준비하러 나서는 시간. 현관 귀퉁이에 내몰려 있던 자전거가 일주일 만에 바깥 바람을 쐬는 시간이기도 하다. 원하는 빵을 손에 넣으려면 빵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가야 한다. 우리 동네 빵집에서만 파는 견과류가 쏙쏙 박힌 통밀 식빵과 적당히 고소하고 프루티한 원두 100g 한 봉을 받아 들고 동네를 한바퀴 달린다. 무사히 원하는 빵을 장바구니에 담아 페달을 밟는 이 시간은 확실히 행복하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삶의 리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리듬에 조금 더 집중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온전히 즐기게 된다면 그 리추얼이 우리 일상의 평온함을 어느 정도는 지켜줄 것이다. 예측도 통제도 불가능한 시대를 살면서, 성공보다는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MZ세대의 트렌드라고 한다. MZ는 아니지만, 늘 그들과 가까이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는 나는 오늘도 나만의 리듬을 타면서 트렌디하면서도 단단한 나의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