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7살이 된 내 딸 소피아. 점점 어른이 되어가며 결국은 나의 곁을 떠날 테지만 그래도 지금 하는 행동들을 보면 마음은 벌써 나를 떠난 거 같아. 학교 갔다 와도 도통 나와 얘기를 안 하고 핸드폰만 보고 있어. 흘깃 보니 케이팝에 빠져서 하루 종일 한국 가수의 유튜브만 보고 있는 거 같아. 나도 잠깐 봤는데 똑같은 리듬에 똑같은 춤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가 젊었을 때 즐기던 락캔롤이 역시 진정한 청춘의 음악이지. 이어폰을 끼고 케이팝만 듣고 나와의 대화를 안 하려고 하니 어릴 때 그렇게 수다스럽던 소피아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이럴 때 헤어진 남편이라도 있으면 상의할 수 있을 텐데 이미 다른 여자와 영국으로 가버렸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 이번 휴가엔 우리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도 만나고 소피아와 많은 얘기도 해야겠어.
“소피아, 이번 여름휴가에 외할머니 집에 가자.”
“리옹? 싫어. 난 친구들이랑 그냥 파리에 있을래.”
역시나 예상된 반응.
“아, 참. 엄마 우리 한국에 안 갈래?”
“한국? 거기 위험한 곳 아냐? 뉴스에 보니 핵무기로 매일 위협하는 곳이잖아.”
“엄마. 그곳은 북한이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남한.”
남한이든 북한이든 같은 한국 아닌가?
“이번에 같이 한국 가면 엄마 말 잘 들을게.”
당연히 거짓말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딸이 원한다고 하고 나도 안 가본 곳이니 한번 가 볼까? 일단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아야겠네. 딸은 무조건 홍대에서 묵고 싶어 하니 홍대에 있는 호텔을 찾아보니 홍대엔 호텔보다 게스트 하우스가 많이 있네. 아직 게스트 하우스에선 한 번도 자본 적이 없는 데, 다른 여행객들과 어울릴 수도 있고 뭔가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 같아.
예약 사이트를 검색해보니 역시나 다른 여행객들이 묵고 써 놓은 후기가 제일 많이 도움이 되는 군. 유난히 후기와 평점이 높은 곳이 눈에 띄는 데.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 이름도 맘에 들었어. 일단 예약. 모든 예약은 모두 엄마에게 맡겨 버리고 가져갈 옷만 챙기고 있는 소피아. 이럴 땐 귀여운 내 딸인데.
인천 공항에서 홍대까지 한 번에 기차로 연결되는 구나. 호스트가 미리 준 설명대로 찾아가니 10분 만에 쉽게 찾았어. 가는 길에 보이는 예쁜 카페들과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을 보니 나도 이번 여행이 잘 될 거 같은 기대감이 드는 걸.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는 그냥 평범한 한국의 가정집이네. 반갑게 맞이하는 주인의 이름이 오아짱 (Oazzang) 이래. 뜻은 오아시스의 대장 (Captain of Oasis). 모히칸 머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나도 젊었을 때 펑크락 그룹의 기타리스트였는데 이 친구도 펑크락을 하는 친구인가? 차차 알아가야지.
일단 방을 봤는데. 이런 어쩌면 좋아. 호텔 방에 화장실이 없어. 급하게 예약하다 보니 화장실이 공용인지 확인을 안 했네. 소피아는 괜찮다고 하지만 왠지 기분이 별로야. 꼼꼼히 확인 안 한 엄마의 책임인 거 같아서. 오아짱은 오늘 밤은 늦었으니 하룻밤 자고 정 불편하면 내일 모두 환불해 줄 테니 다른 곳을 찾아보래. 일단 제의는 고맙다고 하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어.
마침 저녁 시간이라 모든 게스트들과 한국식 바비큐 식당에 가자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어. 안 그래도 한국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던 건데. 바로 샤워만 하고 따라갔어.
와, 이건 진짜 맛있는 데. 특히나 소주와 같이 곁들이니 열 시간을 비행기의 좁은 의자에서 고생했던 피로감이 확 풀리는 걸.
같이 오아시스에 있는 친구들을 보니 작년에 한 달 동안 오아시스에 묵었고 올해 또 다시 한 달 동안 묵고 있는 영국에서 온 모니카. 이 친구는 내 딸 보다 더 케이팝에 빠져있어. 소피아랑 완전 죽이 착착 맞아. 벌써 둘이 다음 날 공연을 같이 보러 간다고 난리야. 이 거봐! 우린 아직 오아시스에 머물지 확실히 결정도 안 되었다고.
또 다른 친구는 나와 같은 프랑스에서 온 안드레스. 이 친구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일 년 동안 세계여행 중인데 서울에는 3일만 있으려고 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연장하다 보니 지금 벌써 5주째래. 그만큼 서울이 매력 있는 곳인가?
저녁을 먹고 와서 거실에서 자연스럽게 맥주 파티가 벌어졌어. 여기서 오아짱이 왜 오아시스를 열게 되었는지도 듣게 됐어. 특별한 사연이 있었네. 그런 일을 당 한 사람 치고는 너무 밝고 활기차 보여. 나이도 나와 같은 1966년생. 역시나 펑크락을 좋아하고 지금도 공연장에서 슬램을 한데. 그래서 이렇게 젊어 보이는 걸까?
딸도 나도 내일 화장실이 딸린 호텔로 옮길 생각은 이미 사라졌고 이미 오아시스와 서울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어. 신나는 서울에서의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 버리고 마지막 날 밤. 역시나 자연스럽게 맥주 파티가 열렸어.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유튜브로 찾아서 보여주다가 오아짱이 한국의 펑크밴드인 크라잉넛의 음악을 보여줬어. 오아짱은 이들과 20여 년의 친분으로 이들의 음악을 즐기고 있데. 들어보니 딱 내 취향이야. 특히 말달리자. 이들의 공연을 꼭 보고 싶은 데 이미 우리는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는 날이야. 아쉬운 마음에 이들의 시디를 살 수 있을까 알아봤더니 저녁 9시에도 문을 연 레코드점이 있었어. 오아짱과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들의 시디 7장을 모두 샀어. 프랑스에서 신나게 들어야지.
일주일의 서울 여행 동안 소피아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느낌이야. 같이 한국 음악을 듣고 같이 한국 음식을 먹고 서울을 신나게 돌아다니다 보니 전처럼 살가운 딸이 됐어. 처음 올 때의 약속처럼 언제나 내 말을 듣지는 않지만 적어도 무시하지는 않는 딸이 되었어.
파리에 다시 돌아와서는 습관적으로 인터넷으로 한국 펑크락 소식을 검색하는 데 다음 주에 크라잉넛의 공연이 있네. 더구나 이번 공연은 홍대의 유명한 펑크락 공연장인 스팟이 문을 닫게 돼서 하게 된 마지막 공연이야. 한국의 유명한 펑크락 멤버들이 모두 나오는. 어떻게 할까? 주말 이틀 동안 서울에 다녀오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그래도 일생에 한번 있는 기회. 가자.
“소피아, 다음 주말에 서울에 가자.”
“뭐? 엄마, 말도 안 돼. 다녀온 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잖아. 그리고 그 먼 곳까지 가서 이틀만 있다가 오자고?”
“뭐 어때. 그냥 가는 거야.”
-위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일어난 일들은 실제 지난 3년간 오아시스 게스트 하우스와 게스트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